에디터의 손길 혹은 입김
인스타그램은 공평하다. 모든 사용자가 알고리듬의 지배를 받는다. 인스타 홈에 뜨는 포스트는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포스트 중에서 알고리듬이 선정한 것 + 역시 알고리듬이 선정한 광고 포스트다. 그러니까 전부 기계가 선택한 것이다.
브런치는 다르다. 브런치 홈에는 알고리듬이 선정한 글 외에 ‘브런치가 추천하는 글’이라는 이름으로 브런치 에디터가 선정한 글이 뜬다. 전자는 이용자 각자의 성향에 맞춘 것이지만 후자는 모든 이용자에게 동일하게 표시된다.
그리고 이 ‘수제(手製)’ 큐레이션이 브런치를 불공평하게 만든다.
에디터가 선정한 글(이하 에디터픽)은 모든 이용자가 보는 만큼 엄청난 노출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구독자를 가진 작가가 아니라면 아마 평소에는 그 정도 노출을 당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불공평성 때문에 브런치 홈에서 에디터픽을 보면 그냥 넘겨버린다. 아니, 비겁하게 돌려 말하지 않고 까놓고 말하겠다. 내 글은 안 뽑아주니까 드럽고 치사해서 안 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브런치 작가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에디터도 사람인데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노출의 기회를 줄 수 있겠는가. 그건 이해한다.
그러면 방금 했던 말을 번복하겠다. 내가 에디터픽을 그냥 넘기는 이유는, 아니, 꼴뵈기 싫어하는 이유는 불공평이 아니라 불공정성 때문이다.
왜 불공정하냐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브런치는 에디터픽 선정 과정과 원칙을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①에디터가 몇 명인지, ②설마 하루 동안 올라오는 수많은 글을 다 읽을 수는 없을 텐데 어떤 식으로 글을 추리는지, ③글의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등이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에디터픽을 보면 에디터(혹은 에디터들)의 취향이 보인다. 에디터픽을 따로 모아놓은 공간이 없어 정확한 분석은 불가능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몇 달 전까지 에디터픽은 회사 생활의 고단함(+퇴사), 요리, 여행지를 다룬 글과 캔디류의 글 일변도였다. 캔디류 글이란 “출근길에 지나가던 차 때문에 옷에 구정물이 튀어서 기분 나빴는데 회사 갔더니 동료가 물 튄 건 줄도 모르고 옷 무늬 예뻐요, 라고 칭찬하는 거야. 그래, 불행도 행복도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야” 같은 느낌의, 일상의 소소한 불행에서 느끼는 역시 소소한 행복을 말하는 글이다.
내 취향은 아니다. 나는 요리 에세이와 여행 에세이에 관심이 없고 내 옷에 구정물이 튀었으면 “저 씨발 운전사 새끼 프레젠테이션 때 방군 줄 알고 똥 싸고 개망신당해라!”라고 저주하는 스타일이다. 차마 사고 나라고는 못 하고 딱 그 정도의 소소한 불행만 빌어준다.
최근 들어서는 에디터픽에 더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글을 포함시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대체로 내 취향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간 쌓인 불만(“내 글은 안 뽑아주니까 드럽고 치사해서 안 본다”) 때문에 그냥 안 읽고 넘겨버리기 때문에 내 취향인지 확인할 틈도 없다.
아, 브런치 에디터의 취향을 설명할 표현을 찾았다. 무난한 글. 그래, 내가 볼 때 브런치 에디터는 무난한 글을 좋아한다. 무난한 글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런 글 위주로 선정하는 편향성이 나쁘다는 말이다.
이런 불공정 내지 불공평성은 나만 인지하고 있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지적 사항은 달라도 에디터픽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용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다른 작가들의 글과 댓글에서 확인했다.
그러면 이런 불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30초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프리랜서 무명 번역가로 끈질기게 10년을 버텼다. 근데 아무도 내게 생존 비결을 묻지 않아 내가 먼저 썼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어느 젊은 번역가의 생존 습관>. 차마 절찬 판매 중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판매 중.
에디터픽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네 가지 제안한다.
브런치 에디터는 어딘가에 숨어서 작가들의 글을 평가한다. 에디터 입장에서는 평가가 아니라 그저 좋은 글을 고르는 것뿐이라고 해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게 평가다.
평가받는 것은, 그래, 좋다. 어차피 온라인에 글을 공개한 이상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든 평가받는 건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같은 이용자가 내 글을 평가하는 것과 운영자가 심사하고 그 결과를 공표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에디터픽은 바로 그런 심사의 결과다. 그리고 우리는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심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이렇게 말한다.
주최 측의 농간.
그 과정이 실제로는 공정했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은 심사위원이 베일에 싸여 있다는 것만으로 그 공정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이용자의 불만을 불식하기 위해 브런치 에디터가 정체를 밝히길 바란다.
그렇다고 이름, 나이, 성, 경력을 낱낱이 공개하란 말은 아니다. 브런치 작가들처럼 필명과 자기소개 정도만 있어도 좋다. 중요한 건 에디터가 완벽한 익명이라는 커튼 혹은 보호막 뒤에서 작가들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어떤 글이 왜 에디터픽이 됐는지 독자는 물론이고 그 글을 쓴 작가조차도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점이 에디터의 마음에 들었고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도 읽으라고 추천해주는지 역시 흑막에 가려져 있다.
그저 에디터의 취향에 맞나 보다 하고 넘겨짚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까 나처럼 에디터와 취향이 맞지 않는 사람은 선정 기준이 편향적이라고, 자의적이라고 고깝게 본다.
이런 불만은 에디터가 선정한 글에 댓글을 달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어떤 글을 추천 글로 뽑았다면 분명히 그 글을 읽고 느끼거나 영감을 받은 게 있을 테니까 그걸 솔직하게 쓰면 된다. “갑자기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왈칵 눈물이 날 뻔했어요. 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뵌 지 한참 됐거든요. 어머니의 마음을 묘사한 단락이 특히 제 마음을 울리네요.” 이런 식으로 성의 있게.
그러면 다른 이용자가 설령 그 감상에 동의하진 않는다고 해도 ‘아, 그런 점이 좋았구나’ 하고 이해는 할 것이다. 취향의 간극은 좁힐 수 없어도 불신의 골은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브런치 에디터가 한 명 혹은 두 명 밖에 안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취향의 일관성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추측하는데 아마도 에디터는 여성일 것이다. 에디터픽에서 주로 보이는,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부드러운 필치로 쓴 글은 다분히 여성 취향이기 때문이다. 이게 내 편협한 남녀관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볼 때 그건 대체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아하는 소재와 스타일이다.
만일 이런 내 추리가 맞다면 지금의 에디터픽은 다양한 주제, 생각, 문체를 아우를 수 없다. 그저 맨날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글만 올라올 뿐이다. 이런 표현 미안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에디터픽으로 선정된 글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지금 그 글들의 질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선정의 편향성, 부족한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에디터픽의 다양성을 키우려면 에디터를 늘리는 게 최선이다. 거기에 더해 작가들에게도 추천 글을 선정할 기회를 준다면 최최선이고.
말했다시피 에디터픽으로 선정되면 수많은 이용자에게 노출되는 혜택이 있다. 에디터픽은 브런치 작가에게 큰 상이다. 상을 줄 때는 추첨이 아닌 한 간략하게라도 선정 기준이 명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 주최 측의 농간이란 소리가 나온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에디터픽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이다. 솔직히 이거 다 개소리일 수도 있다. 내 글 안 뽑아준다고 색안경 끼고 뭣도 모르고 지껄이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브런치에 글만 쓸 뿐 브런치 운영진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또 내가 욕먹어야 할 게 있으면 누구라도 알려주시길. 유명한 작가가 되려면(2022년 예정) 욕먹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