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하이라이트 Oct 11. 2020

스스로 유명해지십시오

번역가(혹은 프리랜서)의 생존법

무명 번역가가 유명 번역가가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릴까요? 5년? 10년? 20년?


저는 번역을 시작할 때 ‘한 5년쯤 하면 내 역서 중에서도 그럭저럭 유명한 책이 나오고 10년쯤 하면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는 책도 나오겠지. 그러면 나도 덩달아 유명해지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제가 요즘 인스타그램을 하는데요, 현재 제가 팔로우하는 사람이 1,000명 정도 됩니다. 대부분 소위 북스타그래머, 그러니까 책과 관련된 사진과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제 인스타 홈 화면에는 그들의 글이 뜹니다. 홈 화면을 보면 그때그때 화제가 되는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이 사람, 저 사람의 글에서 똑같이 등장하는 책들이 있거든요. 그건 출판사에서 서평단에 뿌린 책일 수도 있고 그 자체로 화제성이 있는 책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제 인스타 홈 화면만 봐도 요새 어떤 책이 ‘핫’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유감인 건 제 홈 화면에 제 역서가 뜨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3월부터 인스타를 시작했고 그후로 역서가 3권이 출간됐는데 정말 보기 어려워요. 그중 2권은 제법 규모가 있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저자들의 배경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했는데 말이죠.


그제야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역서가 유명해져서 나도 유명해지길 바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바람인지!


왜냐고요? 첫째, 역서가 유명해지는 건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둘째, 역서가 유명해져도 역서만 유명해집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때그때 화제가 되는 책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책이라고 다 화제가 되진 않아요. 제가 볼 때는 베스트셀러 30위권에 최소 두어 달은 머물러야 사람들이 ‘아, 나도 그 책 제목 들어봤어’ 하는 책이 됩니다. 제 역서도 비록 삼일천하였지만 베스트셀러 1위를 한 적이 있고 30위권 안에 들어간 책도 몇 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부 1~2주 만에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어요.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기간 유지하는 책은 정말 드뭅니다.


이렇게 보면 화제의 베스트셀러란 지위는 극소수의 책에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비유하자면 주연급 영화배우가 될 확률이랄까요. 그보다 인지도가 덜한 조연급이 되는 것조차 어렵고 대부분의 책은 단역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역서가 유명해지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번역 속도가 정말 빨라서 1년에 10권을 번역한다고 해봤자 고작 10권입니다. 《2019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18년 신간발행 종수는 총 63,476종입니다. 6.3만 권 중에서 10권이 화제가 될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 굳이 정밀한 계산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서가 유명해진다고 역자도 유명해질까요? 지금 생각나는 번역가의 이름을 한번 대보세요. 아마 정영목, 공경희, 김석희, 안진환, 이희재, 권남희, 양억관, 김난주 정도일 거예요. 모두 경력이 30년쯤 된 번역계의 거목들이죠. 거기서 더 나가면 번역으로 상을 받거나 번역에 대한 책을 낸 분들이 추가되겠죠. 이렇게 번역가 혹은 번역가 지망생들도 번역가들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편집자나 독자가 기억을 해봤자 몇 명이나 기억할까요? 사람들은 작가는 기억해도 역자는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역서가 희박한 확률을 극복하고 유명해진다고 해도 역자가 같이 유명해질 확률은 다시 또 희박합니다.


요컨대 역서가 유명해져서 나도 유명한 번역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실현될 가망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말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죠. 유명한 번역가가 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유명해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닐 겁니다. 제 경우에는 유명해져서 더 좋은 조건(=번역료)으로 의뢰를 받고, 내 책을 내고, 강연이나 강의를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또 인지도와 몸값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더 여유 있게 사는 게 최종 목표고요. 아마 다른 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 그런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번역가가 있습니다. 혹시 서메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서유라 번역가를 아시나요? 2017년 7월에 첫 역서를 내고 현재 클래스101에서 번역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경력이 3년 정도 되는데 강의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요? 스스로 유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서메리 번역가는 2018년에 브런치에서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회사를 다니다 퇴사하고 프리랜서 번역가가 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글이었습니다. 이 연재물이 인기를 끌어 2019년 3월에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됩니다.


이후 2019년 10월에 카카오에서 주최한 크리에이터스데이 2019에 강연자로 나서는 것을 포함해 북토크나 글쓰기 강연을 통해, 그리고 또 유튜브인스타그램을 통해 독자 혹은 잠재독자들과 접촉합니다. 저서도 2019년 10월, 2020년 4월, 2020년 10월에 또 출간되고요. 그리고 2020년 9월부터 앞서 말한 대로 클래스101 강의를 시작합니다.


어떤가요?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가가 되자마자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겠다고 결정한 판단력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실행력이요. 저는 경력이 10년이 될 때까지 그런 생각도 행동도 못 했거든요. 골방에 앉아서 번역만 하다 보면 알아서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네, 길이 열리긴 했어요. 근데 그게 탄탄대로는 아니더라고요. 좁은 길이 조금 넓어졌을 뿐 그래도 좁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서메리 번역가의 길은 어떨까요? 스스로 여러 개의 길을 냈습니다. 번역만 아니라 출간과 강연이라는 또 다른 길을 만든 거죠. 거기에 더해 유튜브(구독자 약 7만 명), 인스타그램(팔로워 약 6,500명)을 운영하며 인플루언서의 길도 걷고 있습니다. 이 길들이 넓은지 좁은지는 생판 남인 제가 알 수 없는 것이겠지만 설령 좁은 길들이라고 해도 모두 합쳐지면 번역만 할 때보다 넓은 길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게 번역의 길을 더 넓히는 작용도 할 겁니다.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기용할 때 경력이 비슷하다면 다양한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는 번역가를 선택할 게 당연하니까요. 후광 효과라고 들어보셨나요? 사람을 볼 때 어떤 한 가지 특징 때문에 다른 면도 더 좋아 보이는 효과입니다. 서메리 번역가에 대입한다면 저서를 출간하고 강의를 하니까 당연히 번역도 잘할 것이라 기대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다방면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으니까 그 ‘이름발’로 역서가 더 잘 팔릴 것이라는 기대도 있겠고요. 그래서 좋은 책을 번역할 기회가 더 많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남의 얘기만 했나요?




그러면 제 얘기를 하자면 저도 2017년부터 브런치에 글을 썼습니다. 제 글이 큰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브런치를 보고 몇몇 출판사에서 번역 의뢰가 들어왔어요. 조건(=돈 혹은 일정)이 맞지 않아 모두 계약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요. 그러다 2019년에 번역가의 습관에 대한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2020년 4월 출간)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또 브런치를 통해 번역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글쓰기 모임 리더, 온라인 번역 강의 제안도 들어왔죠. 유감스럽게도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현재 상황에서 모임 진행을 위해 여러 차례 서울을 오가는 것이나 강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여의치 않아서 둘 다 고사했지만, 그런 제안이 들어올 만큼 인지도가 올라갔다는 건 분명합니다. 참, 지난 9월부터 ⟪월간 콕⟫이라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독립잡지랄까요, 여하튼 월간지에 <만만한 온라인 글쓰기>라는 제목의 연재를 싣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작은 말했다시피 브런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브런치만으로 한계를 느껴 인스타그램도 병행하고 있어요. 곧 유튜브도 시작할 예정입니다. 브런치를 시작할 때는 번역가 김고명을 알리는 게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그 목적이 더 확장됐습니다. 지금은 출판계의 인플루언서 김고명을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번역만 하는 게 아니라 책도 쓰고 또 좋은 책을 소개하고 각종 글, 영상,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권하고 그 노하우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게 현재 제가 바라는 지위입니다. 그렇게 여러 갈래로 길을 닦아놓으면 결국 그 길들이 모여서 더 넓은 길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게 제 인생의 탄탄대로가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유명해질 길을 찾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SNS를 시작하세요. 꾸준히 하다 보면 분명히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제가 다 해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번역료는 왜 안 오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