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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Dec 01. 2018

유부남 번역가에게 필요한 것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있는 남자 번역가와 지망생, 현재 가정이 있고 번역가가 되기를 원하는 남성을 위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다. 유부남 번역가에게는 아래의 5가지가 필요하다.

1. 맞벌이
<번역으로 월 300이 가능할까>에서 말했지만 번역가가 월 300을 벌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제 막 번역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8년 3/4 분기 2인 이상 가구의 평균소득은 474만 7,900원, 2017년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비지출은 302만 8천 원이다(참고로 1인 가구는 137만 3천 원). 간단히 말해 번역가의 소득만으로는 2인 이상 가구가 평균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

물론 적게 벌고 적게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그러자면 가족 구성원이 평균 이하의 욕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득을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고 번역가의 소득이 쉽게 증가하지 않는 만큼 맞벌이가 사실상 필수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프리랜서의 특성상 배우자는 기왕이면 매월 따박따박 봉급이 나오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닌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아내의 벌이가 나쁘지 않기 때문에 간간이 번역 일이 끊겨도 마음 편히 쉬는, 아내 등골 빼먹는 남편으로 살고 있다.

2. 2인자의 자세
내가 번역한 <마이크로트렌드X>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미세 트렌드가 '2인자 남편'이다. 2인자 남편이란 부인보다 소득이 적거나 전적으로 부인에게 수입을 의존하는 남편을 뜻한다. 아무래도 번역가는 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에 2인자 남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방금 말했다시피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부인을 두면 뒤가 든든하니까 2인자 남편이 되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2인자 남편으로 살려면 2인자답게 처신해야 한다. 부인을 굴욕적으로 떠받들 것까진 없지만 힘들게 돈을 벌어오는 부인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은 알아야 한다. 괜히 남자라고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는 일도 없어야 한다.

꼭 부인이 돈을 더 많이 벌지 않는다 해도 똑같이 프리랜서로 일한다면 모를까, 부인이 직장 생활을 한다면 바깥에서 일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안해 집에서는 되도록 편히 쉬도록 프리랜서 남편이 편의를 봐준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원만해질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어느 정도는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걱정되는 일이 있으면 내게 털어놓고 나는 무심히 게임을 하며 그 말을 들어주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다. 그리고 집에서는 그냥 편히 쉴 수 있도록 집안일은 거의 내가 도맡아 한다.

3. 살림 능력
위에서 말한 대로 부인의 편의를 봐주는 방법 중 하나가 집안일을 챙기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요리, 설거지, 청소를 내가 다 하고 빨래는 굳이 아내가 하겠다고 하여 지금껏 침범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아이가 태어나 아내가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만큼 빨래도 내 몫이 될 것 같다.

물론 종일 번역을 하면서 틈틈이 혹은 일과가 끝난 후에 집안일을 하는 게 쉽진 않다. 귀찮고 짜증이 날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철저한 2인자 남편의 자세로 돈을 더 적게 버는 사람이 살림을 사는 게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옳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프리랜서가 집안일을 챙기는 게 효율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왕에 살림남이 될 것이면 비장의 무기가 한두 개쯤 있으면 좋다. 나로 말하자면 김치찌개와 미역국은 아내에게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어느 날인가는 아내가 퇴근해서 들어오자마자 울먹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 제발 우리 집이길 바랐는데 정말 우리 집이어서 너무나 행복했다나.

참고로 초보 요리사에게는 <아내의 식탁>, <이밥차>라는 스마트폰 앱을 추천한다. 간단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조리법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4.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건조기 등등
어차피 살림을 맡을 거라면 자동화기기가 있는 게 훨씬 좋다. 내가 놀면서 집안일하는 것도 아니고 일할 것 다하면서 하는데 쉴 시간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쉴 시간을 확보해주는 게 살림용 기계 장치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식기세척기인데 그 덕분에 요리에 설거지까지 다 하는 게 귀찮긴 해도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밥 먹고 설거지 다하고 나서도 내 시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로봇청소기도 예전 집에서는 애용했는데 지금은 남의 집이라 얘가 여기저기 처박고 다니면서 다 긁어놓을까 봐 무서워 그냥 모셔만 두고 있다. 건조기는 이번에 새로 하나 장만했는데 빨래가 보송보송해지는 건 물론이고 귀찮게 널고 걷지 않아도 돼서 신세계다.

기계로 가능한 건 되도록 기계에 맡기면 삶이 수월해진다. 일과 살림을 동시에 챙겨야 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5. 재테크 지식
회사를 다니면 이래저래 주변에서 듣는 게 있지만 프리랜서는 아무래도 혼자 일하다 보니까 경제 지식과 소식에 깜깜해지기 쉽다. 어차피 번역료는 많이 오르지 않으니 돈이 돈을 벌게 하면 좀 도움이 된다. 또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재테크 지식은 필요하다. 꼭 과감한 투자를 하라는 건 아니지만 알아두면 소소하게 돈벌이가 되는 게 있다.


나는 원래 그런 쪽으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담낭을 떼기 위해 입원한 후 혹시라도 나중에 큰 병에 걸렸을 경우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원하자마자 보험, 재테크 서적을 읽고 기본 지식을 습득했다.


그때가 2015년 말로 마침 이율이 4퍼센트대이고 세금도 물지 않는 재형저축이란 적금 상품의 신규 가입이 마감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끝물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 후로 꾸준히 적금을 붓고 있고 주식, 펀드 등에도 깨작깨작 투자 중이다.

소싯적의 나는 재테크라고 하면 신성한 노동을 배제하고 꼼수로 돈을 버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돈이 돈을 버는 게 남의 돈을 훔치는 것만 아니면 뭐가 나쁘냐는 주의다. 하지만 재테크에 대한 입장이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좁게는 재테크, 넓게는 경제에 대한 지식을 갖춰 놓으면 그만큼 번역할 수 있는 책이 늘어날 테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꼭 어딘가에 투자하지는 않더라도 연 몇 퍼센트대 복리 효과를 운운하며 어지간히 오랫동안 유지하지 않고는 그 정도 수익을 보기 어려운 보험을 목돈 만들기 상품이라고 선전하는 것 같은 약은 수법에 홀라당 넘어가서 피 같은 돈을 날리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이 유부남 번역가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10여 년 전에 번역을 공부할 때 현업 번역가였던 김OO 선생님에게 들은 것처럼 번역은 돈도 명예도 잘 따르지 않는 직업이니(<번역가 지망생에게 주는 조언> 참고)이게 정말 천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애초에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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