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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May 07. 2019

번역가여, 자발적 을이 돼라

내가 출판 번역가로 10년이 넘게 버티고 있는 비결은 자발적으로 을이 되는 것이다. 갑을 할 때 그 을 맞다. 어느 업계든 돈 주는 쪽이 갑, 받는 쪽이 을이다.


왜 을이 돼야 하냐고? 꼬장꼬장한 번역가, 말 안 통하는 번역가는 편집자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말 잘 들어주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한다. 


게다가 번역가가 넘쳐나는 시대다. 내가 무슨 이름발이 먹히는 번역가도 아니고 날 대체할 번역가는 항시 대기 중이다. 


그렇다면 자발적 을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1. 문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편집 과정에서 번역문이 수정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번역가들이 있다. 나는 반대로 어지간하면 편집자가 수정한 문장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나는 번역가지 문장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 좀 쓴다는 소리 정도야 들어봤어도 “캬!” 하고 감탄할 만큼 빼어난 문장을 쓴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내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쓰라고 할 명분이 없다.


더욱이 편집자도 글 좀 쓴다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번역 원고를 수정했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정된 문장이 원문의 뜻과 동떨어졌거나 문법적으로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간다.


2. 문의에 최대한 신속하게 답한다.

종종 편집자의 문의를 받는다. 번역을 의뢰하고 싶은데 일정이 되는지, 마케팅을 위해 어떤 자료가 필요한데 마련해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나는 늦어도 1~2시간 안에 답을 한다.


누구나 뭘 물어봤으면 얼른 답을 듣길 바란다. 편집자도 마찬가지다. 번역가가 가타부타 답을 해줘야 일정을 짜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번역가가 의뢰를 받을 수 없다고 하면 빨리 다른 번역가를 알아봐야 하고, 번역가가 자료를 확보하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고 하면 그에 맞춰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편집자로서는 하염없이 답을 기다리게 만드는 번역가와 굳이 일할 필요가 없다. 출판계에 널린 게 번역가다.


3. 번역 의뢰는 가능하면 다 수락한다.

나도 멋 모르던 시절에는 재미없을 것 같은 책, 까다로울 것 같은 책은 적당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한 번 거절하면 그 출판사에서는 다시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거절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유명 번역가에게 거절당했다면 유명하니까 참는다고 쳐도 무명 번역가에게 거절당하면 그냥 다른 번역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4. 요구 사항은 웬만하면 다 들어준다.

역자 후기를 작성해 달라거나 마케팅 자료를 찾아 달라는 부탁, 솔직히 귀찮다. 출판사에서 소정의 보수를 주긴 하지만 돈만 따지자면 그 시간에 한 단어라도 더 번역하는 게 이익이다.


그래도 나는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준다. 편집자의 부탁이란 게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게 아니라 다 책 잘 만들고 잘 팔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책에 공을 들이고 있으니까 그런 부탁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번역가를 다시 쓰고 싶을까. 다시 말하지만 출판계에 널린 게 번역가다.


단, 도서 검토 요청은 거절한다. 출판사에서는 어떤 책을 번역해서 출간할지 결정하기 전에 번역가나 번역가 지망생에게 읽어 보고 검토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한다. 책 내용을 요약하고 샘플 번역도 하고 장단점을 분석하는 등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보수는 15만 원쯤.


그런데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려 검토 작업은 완전히 손해 보는 장사일 뿐만 아니라 기존에 번역하던 책의 작업 일정에도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웬만하면 검토 의뢰는 거절한다. 다만 내가 이전에 번역한 책의 작가가 후속작을 쓴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수락한다.


5. 원고에 대한 피드백은 고맙게 받아들인다.

내가 속한 에이전시는 작업 중에 1장 원고가 완성되면 출판사에 보내 피드백을 받는 게 원칙이다. 번역 방향이나 품질이 출판사의 기준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일을 다 끝내 놓고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달라는 말이 안 나온다.


예를 들면 출판사에 따라 원문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기를 요구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과감한 윤문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 이미 같이 작업해본 출판사가 아니라면 번역가가 출판사 성향을 지레짐작하면 곤란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원문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번역한 후 출판사에서 피드백이 오면 거기에 맞춘다.


출판사의 피드백은 최대한 수용해야 한다.  말했다시피 번역가는 문장가가 아니다. 작가도 아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출판사에서 원하는 원고를 만들어주는 기술자다. 어차피 내 스타일로 번역해봤자 편집자가 출판사 스타일대로 뜯어고칠 테고, 괜히 말 안 듣는 번역가 때문에 고생한다고 투덜대기 밖에 더할까. 번역가가 고집부려봤자 욕만 먹고 일감만 사라질 뿐이다.




이렇게 자발적 을이 되자니 자존심 상한다고? 그러면 직접 글을 쓰면 된다. 내 콘텐츠가 있으면 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콘텐츠 없이 남의 돈 받고 남의 글 옮기는 사람이니까 최대한 편집자의 요구와 취향에 맞춰준다.


편집자가 갑질을 하면 어쩌냐고? 내가 겪어본 바로 편집자들도 번역가들처럼 대부분 마음 여리고 남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편집자가 기본적으로 협력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좋은 책 만들어서 잘 팔자는 목표는 번역자나 편집자나 마찬가지다. 서로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하며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번역도 고생스럽지만 편집도 고생스럽긴 마찬가지다. 아니, 내가 볼 때는 편집이 더 머리 아프고 힘든 일이다. 번역가는 번역 하나만 생각하면 되지만 편집자는 편집만 아니라 기획, 디자인, 마케팅 등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밟아야 하는 모든 절차를 거시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수고를 알면 편집자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편집자가 무슨 수고를 하는지 모르겠다면 ⟪출판사 에디터가 알려주는 책쓰기 기술⟫(양춘미 저, 카시오페아)을 읽어보기 바란다.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인데 책쓰기에 대한 책이지만 곳곳에서 편집자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브런치의 <저도 편집자는 처음이라> 매거진도 추천한다.


⟪출판사 에디터가 알려주는 책쓰기 기술⟫에 이런 문장이 있다.


저자와 실랑이하는 사이에 책에 쏟던 에디터의 열정은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번역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번역가와 실랑이하다 보면 편집자는 번역가에게 정이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번역가여, 자발적 을이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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