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간에 더마파크에서의 두 가지 체험은 그렇게 일단락이 됐다. 잠시간은 카트라이더였고 또 잠시간은 말위의 장군이 돼보았던 여행객은 또다시 뚜벅이 용사로 전직하였다. 하지만 더마파크에 들어갈 때와는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템 하나를 장착한 것이었다. 영어로는 Hat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챙이 360도로 달려있는 모자를 기념품점에서 구매했었다. 더 이상 목덜미를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그 덕에 갈색의 카우보이 모자를 쓴 거울 속의 비주얼은 한층 더 여행객에 가까워졌다.
이른 감이 있었지만 제법 늦게부터 시작한 일정이기에 바로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전날 비양도에 다녀올 때는 거리가 멀지 않아 되돌아 갈 때도 걸어갈 정도가 됐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차도로 따졌을 때 숙소까지의 거리는 약 11km 정도였기 때문에 귀갓길(?)을 온전히 두발에만 맡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더마파크의 앞을 지나는 차도에도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그건 이 테마파크를 나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 말인즉슨 월림삼거리에서 내려 구태여 걸어왔던 그 길도 사실은 버스가 지나다니는 길이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왜 지도 어플은 나로 하여금 월림삼거리에서 내려서 걸어오기를 첫 번째로 추천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버스가 너무 드물게 다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더마파크로 오는 시간 때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걸어오는 게 훨씬 최적화된 방법이었기에 지도 어플이 그런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사실을 지금의 상황에 적용하게 되면, 도출되는 결과는 '여긴 정류장은 있지만 버스가 언제 올지는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정류장은 짙은 사투리의 할머니가 버스를 타야 할 곳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그 정류장처럼 벤치 같은 건 없고 흙 위에 표지판만 덜렁 서있는 간결함이 묻어나는 정류장이었다. 그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는 오직 784-1번 버스 하나뿐이었는데 어플 상에서는 그 버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첫차 : 정보 없음 막차 : 정보 없음 배차간격 : 정보 없음
* 현재 운행 중인 버스 없음
어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내가 지금 그 버스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정보뿐이었다.
#34
어쨌든 걸어서 숙소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허허벌판과 같은 곳에서 언제 올지도 모를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상당한 지루함이 예상되는 것이었다. 물론 더마파크까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 월림삼거리까지 되돌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곳에는 더 많은 버스가 더 자주 다니고 이미 와 본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숙소로 돌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 '되돌아간다'는 사안이 그 순간에 조금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그때의 마음은 뭐랄까...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자가용이나 렌터카를 타고 올 것 같은 곳에, 도보 20분, 버스 30분, 다시 도보 30분이라는 고생 아닌 고생을 투여하여 당도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다시 되풀이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다소 짠하다. 그건 너무나 잘 보이는 고생이고, 이미 밟았던 코스이기 때문에 고생에 지루함을 덧 데는 과정이다. 뭐 그런 느낌의 거북함이었다.
반면 올 때와는 다른 경로로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 비슷한 고생일지라도 아직 가본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일말의 설렘이 있으며, 그렇게 될 경우 단지 남들은 차 타고 오는 곳에 와보기 위해 그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나만의 방식으로의 여정 속에서 더마파크에 들른 것뿐이다.'라는 조금 괴상하고 자의적인 해석 혹은 자기 위로가 가능했다. 그런 논리에 의거, 나는 월림리로 돌아가는 방식이 아닌 오던 방향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에서 버스를 기다리기 지루하니 그 버스가 서는 다음 정류장까지 일단 걸어가 보자 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갔을 때에는 그런 최초의 욕구를 중단시키기 아주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있었다. 정류장에 벤치와 지붕이 마련되어 있던 것이다. 그 정도 정류장이라면 일정 시간 정도는 쾌적하게 버스를 기다려볼 만했다. 마침 배낭에는 혹시나 해서 가져온 책 한 권도 들어있었다. 정류장이 비교적 쾌적했던 것은 아마도 그곳이 제주 금능 농공단지라는 공장지대의 중간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 어떤 정서적인 관성 속에 있었던 탓인지 나는 잠깐의 고민을 뒤로한 채 계속해서 걸어가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그 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치며 더 큰 도로가 나오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큰 도로와 교차되는 삼거리를 마주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정류장이 있었다. 더마파크에서 나온 뒤로 세 번째로 마주친 버스 정류장은 다시 간이 정류장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흙바닥에 머리가 둥근 표지판만 우뚝 서있는 황량함이 묻어나는 정류장. 그 정류장을 앞에 두고 다시 지도 어플을 실행했다.
진입한 큰 도로는 월림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여러 길 중의 하나로 그대로 따라가면 금능해변까지 도달하는, 말하자면 해안가까지 거의 수직으로 내려가는 금능 남로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도로의 끝에 도달하면 금능해변 언저리에서 202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던 대로 계속 도보로 이동할 경우에는 한 시간 정도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왕 시작한 걸음걸이에 한 시간 정도를 더 걷는 것은 꽤 해볼 만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다시 만난 정류장에게 또다시 스치듯 작별을 고 한 후, 인도도 마땅치 않은 그 도로를 그대로 계속 걸었다. 하지만 뙤약볕을 가려주는 카우보이 모자를 장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습하고 매운 더운 제주의 날씨는 예상보다 빠르게 위기를 불러왔다. 땀은 비 오듯 했고 체력은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됐으며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도로 가장자리를 걷는 것은 정신적인 피로감마저 제공하고 있었다. 금능해변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상태였다.
괜한 미련을 떠는 것일까. 그러나 다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땅히 되돌아 갈 곳이라봐야 가장 마지막에 지나친 버스 정류장일 터인데 어쩌면 784-1번 버스는 하루에 두 번만 운행하는 버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능 농공단지에만 바지런한 정류장이 마련되어 있는 건 그 버스가 공장 직원의 출퇴근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서서히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시야 저 멀리에서 한 카페가 오아시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35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나는 카페의 마당쪽으로 방향을 꺽었다. 카페는 주방과 판매대 그리고 약간의 테이블이 있는 실내 공간과 우주선 콘셉트로 꾸며진 야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실외를 잠깐 구경하고는 바로 실내로 들어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야외에 앉아 있기는 무리한 일이었다. 실내 공간은 에어컨이 세차게 가동되고 있어서 마치 정말로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바람을 맞으니 약간은 혼미(?)해진 것 같은 정신이 다시 되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페의 실내는 통유리로 된 창가 쪽에 넓은 테이블이 세네 개 정도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빵 진열대가 있었다. 빵들은 종류별로 나뉘어 서로 다른 쟁반에 담겨서 손님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 쪽에는 원하는 빵을 골라서 계산대로 직접 가져갈 수 있도록 종이 포일이 깔린 쟁반과 집게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넓은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하며 배낭을 의자에 내려둔 나는 그 집게와 쟁반을 하나씩 집어 들고는 중심에 위치한 빵 진열대를 돌기 시작했다. 아침을 숙소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난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허기를 달래고 당 충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진열대에는 흔한 빵들도 있고 처음 보는 빵들도 있었는데 진열대의 끝 쪽에 대파가 잔뜩 들어있는 빵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름 자체가 대파 브레드인 녀석은 일단 색감에서는 합격점이었다. 뭘 넣고 구운 것인지 자줏빛이 도는 빵은 겉면에 치즈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치즈 속에는 초록의 파 조각들이 쑤셔 박히듯이 버무려져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삼색의 조합은 왠지모르게 이색적인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큼지막한 대파 브레드 하나를 집게로 집어 쟁반에 담은 나는 그대로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가져온 빵과 함께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직원은 나에게 음식을 먹고 갈 것인지 포장해 갈 것인지를 물었고 나는 당연지사로 먹고 가겠다고 대답을 했다. 대파 브레드는 주문한 음료와 함께 쟁반에 담겨 제공됐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파향이 훨씬 강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 말처럼 충분히 시원하여 단숨에 열기를 잠재우는 것 같았지만 그 양은 조금 아쉬웠다. 보리차 마시듯이 벌컥벌컥 음료를 마시고 싶어 그들을 주문할 때 아메리카노는 사이즈가 어떤 게 있냐고 물었었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나에게 직원은 아메리카노의 사이즈는 단 하나밖에 없다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