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는 언제나 나를 품는다_episode_13 ]
7/29(수) - DAY 3_5
#36
이쯤 되면 왜 그렇게 걷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한 적도 있지만 그건 걷는다는 것에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어떤 일률적인 박자감 속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말하는데 그렇게 신체가 일률적인 행동과 박자감에 가둬지고 나면 생각과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특히 차들이 시끄럽게 달리는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걸을 때 그런 기분이 더 들게 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걷고 있어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고. 그건 비단 정신이 맑아져서, 혹은 생각에 훨씬 잘 집중할 수 있어서 만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기본적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로부터 생각의 연결고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각이 확장되는 것이다.
대화를 하거나 회의를 하다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들이 퍼즐처럼 모여 의논하는 사안의 전반적인 그림이 그려지고는 한다. 한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발생시키고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어떤 것을 준비함에 있어서 실수도 줄일 수 있고 예상되는 문제점도 더 꼼꼼히 체크할 수 있게 된다. 각자의 생각이 상대방의 생각의 빈틈을 매워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그런 생각의 주고받음을 혼자서 영위하는 것에 해당된다. 생각이란 머릿속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수원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란 나 아닌 주변의 것들을 말한다. 온전히 내가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할 지라도 그건 과거의 경험이나 그런 경험들의 조합, 혹은 융합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에 변화를 주면 생각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걷는다는 것은 굉장한 의외성 속에 나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다변화하는 주변을 맞이하는 것은 책상에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든다.
한 줄의 카피를 써야 하거나 한 편의 글을 써야 할 때에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으면 도통 아무 생각도 안나는 경우가 꽤 있다. 그건 내가 똑같은 주변물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똑같은 생각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생각만을 한 다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는 굉장히 받아들이기가 괴로워지는데 AI가 신문기사를 쓰는 세상 속에서 똑같은 것을 내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마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작지만 무거운 사안이다. 데카르트의 말 마따나 생각이 곧 나를 존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럴 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것이 좋다. 나를 뻔하게 만드는 것에서 탈출하여 예상할 수 없는 변수 속으로 나를 보내면 그나마라도 더 신선한 생각이 떠오른다. 어제와 똑같은 동네라고 할지라도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는 다양한 사람들, 혹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산물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제 본 그 동네와는 다를 가능성이 있다. 아침 8시에 나가보는 동네와 오후 3시에 나가보는 동네는 서로 다른 역동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서로 다른 영감과 영향을 줄 수 있다. 나는 이런 과정을 생각을 줍는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종종 생각을 주으러 갈 때가 있다.
실례로 그런 적이 있다. 회사에서 매년 발행하는 소식지의 핵심 메시지, 그러니까 나눔과 봉사에 대한 올해의 대표 슬로건 정도를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책상머리에서 머리를 쥐어짜 봐야 특별히 의미 있는 구절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살짝은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 인근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나는 근처에서 묘한 광경을 보게 됐다. 할머니 세 분 정도가 반지하 정도 되는 빌라의 주차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놀고 있는 것이었다. 세 분은 주차장에 피서라도 온냥 뭐가 재밌는지 깔깔 거리며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모습은 참 생경한 장면이었다.
할머니들은 왜 하필 지하주차장에 돗자리를 깔고 놀고 있던 것일까? 코로나 때문에 노인정에 갈 수 없어서 일까? 만약 그렇다면 코로나라는 것이 참 많은 분들의 일상을 바꾸어 놓은 것이구나. 그렇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도 저 할머니들은 또 다른 일상의 모습을 만들어 유쾌한 삶을 계속 영위하는구나. 일상이 바뀐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의 연결고리들이 만들어졌다.
비단 할머니들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거리의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거리 위의 사람들도 여전히 자기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서 일상이라는 단어가 착안됐다. 나눔이나 봉사도 일상의 영역인데 일반적인 일상이 모습이 변할 뿐 그래도 계속되는 것처럼 나눔이나 봉사도 형태를 달리 할 뿐 계속 이어져야 하는 무엇이겠구나. 그런 생각들이 얽이를 만들면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코로나 19와 공존하는 세상, 손은 닿기 어렵지만 마음은 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식지 제일 가운데 페이지에 배치되는 슬로건을 만들게 됐다. 거리를 활보하며 생각을 줍고, 그 생각들이 파생되며 낳은 또 다른 생각들을 퍼즐처럼 맞춰서 만든, 말하자면 걸음의 산물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요즘의 내가 매일매일 건강한 걷기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출근길에 광화문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지 않고 사무실이 있는 서촌까지 곧잘 걷고는 했고, 그런 시간을 통해 읽었던 책의 내용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생각의 퍼즐을 맞춰보기도 했는데 한 시간이 넘는 지하철 출퇴근 거리는 점점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근래에 사무실 인근으로 독립을 하게 됐다. 독립을 하게 되면 출퇴근이 편도로 도보 25분이 되는데 다시금 일상에 여유가 찾아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는 그 독립과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마음이다.
어쩌면 걷기 위해서 제주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4년 전 홀로 제주로 떠났을 때 수도 없이 걷고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제주의 논밭을 가로지르며 비와이의 쇼미더머니 경연곡을 흥얼거렸다. 자유와 자유의 순간은 그렇게 하나의 끈으로 이어지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