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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 Nov 12. 2023

인간이 정육면체라면

누구나 삶의 짐이 있다. 누구나 흠결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다. 전쟁터에서 총탄에 상흔을 남긴 채 돌아온 병사들처럼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다치고 찢긴다. 사람이 정육면체의 조형물이라면 어떤 면은 밝게 빛나고 또 어떤 면은 어둡고 또 어떤 면은 이끼가 끼어 있을 것이다. 모든 면을 밝게 만들 수는 없다. 모든 면이 밝다고 하더라도 그건 마치 조증에 걸린 사람처럼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나라는 사람 자신의 인생이지만 그 모든 면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애석한 사실이다. 나의 인생이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 어엿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 가능한 것은 어떤 면을 보여줄지에 관해서이다. 6개의 면 중 어떤 면을 앞쪽으로 둘 것인가. 그래서 나를 어떤 사람을 인식하고 규정하게 할 것인가. 그 고민과 실천은 해볼 만한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정육면체의 모든 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다. 어떤 쪽을 드러나게 할 것인지 또 드러나지 않게 할지는 애초부터 결정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 선택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면을 전면으로 두는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두운 면을 숨기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어떤 모습을 주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점이다.


사람은 어떤 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데 쓸 수 있는 에너지에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를 해석하는 데 있어 상대방의 에너지를 아껴주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약 항상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어떤 편안함이나 안도감을 느낀다면 그건 인식의 비용을 적게 쓰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사람의 존재가 나를 소비시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의 불확실성을 인내하기란 어렵다. 인생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일지언정 한 사람이 그 인생의 모든 면을 윤택하게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밝게 빛나는 곳을 계속해서 갈고닦아 보여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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