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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Sep 16. 2018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작은 기쁨을 보는 시인

가을비에 떠오르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

오늘 잔잔한 ‘가을비’를 맞으며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해인 수녀님입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참 좋아했습니다. 무교지만 수녀님이 말하는 종교만큼은 종교라기보다 그저 성숙한 삶의 모습으로 따듯하게 느껴졌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신의 교리를 과도하게 강화하여 성스러워하는 반면, 이해인 수녀님은 항상 본인의 신념을 자연스러운 형태로 잔잔하게 이야기하십니다. 수녀님의 시는 대화처럼, 대화는 기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서 고 박완서 작가에게 “난 언니가 너무 좋아”, “언니 생각에 엄마 잃은 아이처럼 펑펑 눈물이 날 때도 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시던 부분을 읽고는 고고한 종교인이 아닌 너무나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수녀님에게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녀님도 수녀원에서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을 다 내버려두고 그저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는 말은 할 일이 산더미 같던 순간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뜻없이 외우는 기도보다는
슬픔도 괴로움도 견디면서
들풀처럼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
더 힘찬 기도가 된다고 

이해인 '집을 위한 노래' 중에서


수녀님은 '뜻없이 외우는 기도'를 해본 적이 있으시고, 기도를 놓칠 정도로 고된 일상 속 살아내는 일이 기도임을 아십니다. 수녀님의 시는 보편적이면서도 경직되지 않은 솔직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시를 펼쳐 읽든 항상 순간적인 공감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면
고독이 말없이 다가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와진다는 것을. 

이해인 '플라토닉 사랑' 중에서


수녀님의 시에서 '사랑'은 절절하면서도 절제되어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외로움, 고독, 사랑, 좋아함과 같은 감정에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수녀님의 글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이를 알면서도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작하기에 말없이 다가오는 그런 사랑이 그리워지는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 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 없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게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움큼의 시(詩)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이해인 '가을 노래'


존경할만한 반할만한 것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습니다. 


수녀님의 성숙한 삶을 시를 통해 느낄수록 참 순수해지고 맙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단순하고 절절했던, 순수한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해가 넘어갈 준비를 하는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아 가고 만물이 깊어지는 즈음,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작고 소중한 것들을 발견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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