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로!
종종 벅차게 기쁘거나 슬픈 일이 일어날 때, 무작정 집 근처 서점에 간다. 그리고 내 마음이 투영된, 또는 투영될 책을 찾는다.
어제 그렇게 만난 책이 '배움의 발견(Educated)'이었다.
책을 펼치자 눈에 들어온 '피그말리온'이라는 소제목, 그리고 첫 문단.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를 처음 봤을 때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보다 그렇게 멋진 곳을 내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29일, 3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경로로 꿈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싱가포르에 간다.
이토록 빙빙 돌아올 일인가 싶을 정도로 돌아왔다. 왜 누군가에게는 쉽게 열리는 문이 나에게는 이토록 안 열리는지 많이 답답했다. 방향을 잃진 않았지만 어느새 싱가포르에서 일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에세이를 끝내고 스타인버그 교수에게 보냈다. 책상 건너편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교수를 보며 나는 내 에세이가 엉망이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친 지 30년이에요. 이 에세이는 그동안 읽어 본 것들 중 가장 훌륭한 에세이 중 하나입니다."
나는 모욕당할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이런 말을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p.375)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나에게 이 문은 쉽게 안 열리는 걸까.
과거에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지금 가서 살고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유독 많이 들던 시기가 있었다. 딱 1년 전 이맘때.
실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아직 도달하지 않았을 뿐.
열릴락말락한 문 앞을 한 번 더 열려고 하지 않은 채 떠나서는 안됐다.
지금 가는 게 더 일찍 간 것보다 안 좋다는 생각도 이제는 들지 않는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새로운 (멋진!) 사람들과 일을 만나고, 소중한 사람들 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까. 더 성장한 모습으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찾아온 회사와 싱가포르 정부의 승낙.
We look forward to welcoming you to Singapore
"네, 그토록 원하던 싱가포르에서 일하세요! 여기 당신 이름으로 된 EP Visa가 승인됐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이 정도 조건이라니 싱가포르에선 환영이에요. 좋은 회사에서 일하시네요."
나는 내가 케임브리지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다른 이유들을 생각해냈다.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그 사람 내부에 있어요.
스타인버그 교수는 이 상황을 피그말리온에 비유하더군요. 주인공은 좋은 옷을 입은 하층 노동자였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단 그 믿음이 생긴 후에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지요." (p.381)
어느 순간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믿고 있었다.
"갈 줄 알았어." "너 아니면 누가 가" "You will go soon because you deserve it" "It has been a long wait. You will get a good result soon" "싱가포르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눈이 빛나는데 어떻게 안 가요." "진심으로 응원한다"
가서도 겸손하게 믿자. 너의 눈이 빛난다는 사실을. 너는 빛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느새 난 내가 싱가포르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다른 이유들을 생각해 낼 필요가 없었다.
2018년 6월에 올린 브런치 첫 글,
그리고 아래 글에서 2년 동안 좀 더 견고해진 나의 일,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동료와 친구들과, 고마운 회사의 축하 속에서 자유에 대한 기쁨과 책임감을 갖고 10월, 싱가포르로 이사 갈 준비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