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려고 할 때였다. 늘 책상에 펼쳐져 있어 데스크톱처럼 쓰던 때라 노트북을 가지고 나온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뭐라도 끄적여 보려고 가져온 것이었는데, 한글 파일로 간단하게 쓸거라 딱히 충전 케이블도 없이 달랑 하얀색의 노트북 본체만 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닫은 채 노트북을 올려놓으니 흰색 바탕에 유일하게 적혀 있는 제품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내쪽에서 바르게 보이도록 놓은 채 열려고 하니 안되었다. 노트북을 반대로 해서 제품 로고가 내게 거꾸로 보이자 드디어 노트북이 제대로 열렸다.
그걸 보며 난 의문스러웠다.
대체 왜? 노트북을 쓰는 건 나인데, 왜 항상 거꾸로 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
왜 여는 사람은 거꾸로 보며 열고, 니은 자로 펼쳐져 외부에 있는 사람이 볼 때 비로소 로고가 똑바로 보여야 하는지 그 사실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홍보 효과를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 기업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를 생각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아~ 우리는 참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구나. ]
니은 자로 되어있는 노트북의 로고는 어쨌거나 그 노트북 앞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 내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걸 바라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의 방향에서 거꾸로 보이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쓴다. 정작 그 노트북을 쓰는 건 자신이면서, 그 노트북을 바라볼 남들의 시선을 위해 로고는 그렇게 제작되었다.
노트북 외에 또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아이템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제 막 기고 걷고 하는 아이들을 위한 아이템인 콘센트 안전커버였다. 물고 빨고 쑤시고 이런 걸 좋아하는 아기들의 전기 감전 방지를 위한 안전커버인데, 콘센트를 젓가락 같은 걸로 쑤시지 못하도록 막아놓는 아이템이다. 둘째가 이제 기기 시작하면서 첫째 때 쓰던 안전커버를 꺼내 설치하려는 데 문득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콘센트 위에 꽂는 안전커버의 모양은 그냥 콘센트 모양이다. 콘센트를 막아도 구멍이 두 개 숭숭 뚫려있는 콘센트 모양이 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누가 봐도 거긴 콘센트 자리니까, 콘센트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으면 뭔가 이질감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결국은 또 그걸 볼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서 만든 것이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콘센트 인척 하는 가짜 콘센트.
우리는 왜 이질적인 것, 남다른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모자라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걸까?
그런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생각나는 일화가 있었다. 대학교 시절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중 하나인 장면이다. 사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그게 나에겐 아픔이자 부끄러움? 같은 안 좋은 감정이 똘똘 뭉친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느닷없이 내게 질문을 하셨다. 그 당시 학과 근로 장학생으로 근무 중이기도 했고, 앞에 앉아있던 까닭에 오며 가며 얼굴이 익숙한 내게 질문을 하셨다. 어떤 예시를 들어주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지금 집에 누구누구와 살고 있죠? 이게 질문이었다.
나는 그 말에 차마 아빠랑 단둘이요. 하고 말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었는데도, 나는 부모가 이혼하고, 언니는 서울에 가 있어서 아빠랑 둘이 산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거짓을 말했다. 물론 고3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공식적인 이혼이 지금만큼 덜 익숙한 때라는 변명이 있다 치더라도 그때 당시 난 내게 주목된 그 시선들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던 대학교 친구들이 얼핏 아빠랑 둘이 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을 듣고 이혼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짐작했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었다.
그때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과 달리 난 특이했고, 그들 중 남달랐고, 이질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진실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고 거짓말하고 난 뒤의 나에 대한 자괴감은... 글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아직까지도 이 사소한 것을 기억할 만큼 크게 와 닿았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대학교 생활 중 돌아가고 싶은 순간 중 하나가 바로 그 기억이다. 아주 사소한 그 순간.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질문을 받기 전으로 돌아가 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고치고 싶어 진다.
남의 눈치를 보다 내게 자괴감을 안겨 준 기억을 스스로 만들다니. 아무리 나이론 스무 살 이상인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물지 못한 어리디 어린 나이였기 때문일까?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쓸 때가 많았다. 아이를 낳고도, 아이가 이웃이 건넨 인사에 낯설어 인사를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혹시나 그게 버릇없어 보이진 않을까 싶어 쭈뼛거리는 아이를 왜 인사 안 하냐고 혼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더딘 아이가 가만히 아이들 노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면 행여나 뒤처져 보이진 않을까, 사회성이 없어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며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룬 적도 많았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일까 봐서 걱정되었던 거다.
이 주제의 글을 쓰면서도 여러 생각을 했었는데, 아까 말한 대학교 수업 시간의 일을 쓸까 하다가도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 매번 이혼, 이혼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읽을 때 지겹지 않을까? 이혼에 심각한 트라우마 있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그 걱정을 하다 흠칫 놀랐다. 이 글에서 조차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곤 생각했다.
그래. 나 눈치 엄청 본다. 내 글이 어떻게 읽힐 지도 눈치 보이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도 눈치 보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눈치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라고 합리화시키고 싶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더 이상 내 자존감까지 건드려가며, 내 아이의 특성까지 짓밟으며 그렇게 눈치 보진 않을 거다. 남의 시선 때문에 소중한 나 자신, 내 새끼를 몰아붙이지 않을 거라는 거.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자유 안에서 나는 남의 시선보다는 나 자신, 내 아이, 내 가족, 내 사람들을 내 방식대로 응원하고 지키며 살아가겠다고.
이질적이고, 특이하고, 남다르다고 해서 기죽지 말라고. 그냥 너는 너다. 다른 사람 시선 따위 하나도 안 중요해. 네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걸 따라가.
이렇게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나 역시 남은 생애는 진정 그렇게 살 거라고 다짐하는 밤이다.
남들 신경 쓰지 않고.
나의 딸들아, 남들 신경 쓰지 않고 너희와 함께 씽씽 그네를 타고, 쾅쾅 시소도 타고, 꾸역꾸역 철봉도 하며 같이 신나게 웃어보자.
나의 남편아,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아낀다고 말해주고, 손 꼭 붙잡고 놀러 가자.
나의 친구야, 남들 신경 쓰지 않고 까짓것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 라며 서로의 인생을 북돋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