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못 쓰는 여자

이혼 가정에서 자란 내가 이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법.

by 꽃구름

몇 주 전 나는 다이어리를 샀다. 둘째 아이가 기고, 잡고 서면서 슬슬 나만의 시간이 없어짐을 느끼며 몇 년 만에 산 다이어리였다. 욘석은 생존 본능이 강한 둘째라 그런지 아니면 엄마 없이도 집에 켜켜이 쌓여 있는 장난감 덕분인지 혼자 서도 잘 논다. 이것저것 두드리고, 빨고, 만져보면서 잘 놀지만 이제 행동반경이 넓어지면 육아만으로 벅차고 정신없고 체력 딸리는 시기가 오고 있노라 감이 온다. 돌이 지나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면 집안에서도 크게 다칠 수 있고, 침대든 화장실이든 정복하려 하고 집 안에서 노는걸 지겨워하고 나가자 병에 걸리는 3-4살 시기가 오면 나는 눈코 뜰 새가 없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일을 해야 하고, 글 쓰기, 독서모임도 해야 하므로 시간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년이 코앞인데 11월부터 쓰는 다이어리가 있길래 덥석 사버린 것이다.


사실 그 전에는 다이어리를 매년 샀다. 무한도전 광팬이었던 나는 달력을 매년 샀고, 멤버들의 얼굴로 이루어진 다이어리도 매년 함께 주문했다. 무한도전이 종영하고 아이를 낳고 난 뒤에는 무난한 다이어리나 휴대하기 좋은 다이어리를 샀다. 하지만 무한도전 다이어리 때부터 지금까지 빼곡하게 쓴 다이어리가 단 하나도 없다. 새해 목표만 적고 며칠 빠듯하게 쓰다 깨끗하게 보존된? 그러다 연말에 다시 며칠 빼곡한 연초 연말 인증용의 다이어리랄까 내가 산 다이어리 모두가 그 정도의 흔적이다. 처음 살 때는 매번 잘 쓰고 스케줄 관리를 잘하자며 시작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다이어리 쓰는 게 어려운 이유는 하나 있었다. 난 예전부터 정리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가방에 물건들이 굴러다닐 만큼 뒤엉켜 넣어 다녔고, 주부가 된 지금도 정리를 시작하려고 맘먹으며 돌아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차곡차곡 정리해야 될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뽀독뽀독 설거지하며 희열을 느낀다는 사람을 생각하며 열심히 설거지를 해보아도 나는 설거지가 내내 싫기만 하다. 그런 나를 파악해서인지 우리 남편은 둘째 낳기 전에 식기세척기를 사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 집 식기세척기는 날마다 부지런히 돌아간다.


그런 정리에 취약한 내가 이번에는 좀 내 계획을 정리하자 생각을 하며 내게 맞는 타입의 다이어리 종류를 검색해 결제했다. 다이어리가 택배로 온 날, 나는 우선 달력 스케줄에 정기적인 모임을 쭉 작성했고, 중요한 사항들과 해야 할 일, 약속들을 적어나갔다. 그중에는 첫째 아이 유치원 발표 날과, 지금 다니도 있는 어린이집 하반기 상담 시간은 빨간색으 표시를 했다. 내겐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제, 일이 터졌다.

첫째 아이는 하원하고 저녁밥을 하기 전에 짬 내서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는데 그날 날짜에 16:10분에 어린이집 상담이라고 시뻘겋게 되어 있지 뭔가? 내가 그걸 깨달은 시간은 오후 6시. 선생님이 퇴근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으아!"


뒤늦게 까맣게 잊고 있던 상담을 기억해낸 난 식탁에 앉아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고, 첫째 딸은 무슨 일인가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래? 엄마?"

"오늘 어린이집 상담인데 엄마가 까맣게 잊어먹었어! 어쩌지?"

"그럼 지금 선생님한테 전화해 봐."

"지금 선생님 퇴근하셔서 쉬고 있을 텐데 어떻게 그래. 내일 등원할 때 이야기해야겠어."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다시 놀이를 이어갔지만, 나는 조바심이 났다.


왜 상담시간 지나도록 선생님은 전화 한 통 없으셨을까? 아까 가정통신문 작성해서 보내라는 공지도 내가 상담시간이 다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그렇게 전달사항을 올린 거였나? 핸드폰 번호를 몰라 불편하네.

내일 상담 꽉 차 있어서 못한다고 하면 어쩌지?


그 시간에 준비하고 기다렸을 선생님 생각을 하니 너무 미안해지고, 학부모로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이 보기도 민망해졌다.


그런 불편한 맘을 가진 채 오늘 아침 등원할 때였다. 원래는 동생은 유모차에 놔둔 채 첫째에게 인사하는데 오늘은 동생까지 안고 올라가 선생님을 대면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어제 상담 있는 걸 제가 완전히 깜빡했어요."

"아, 어머니~ 상담 오늘인데요?"

"네?"

"수목금 상담이라 오늘부턴 데요. 어제 안 오셨으면 제가 전화드렸죠. 어머니. 오늘 시간 괜찮으시죠?"


아이가 빤히 보고 있는데 어제보다 더 낯이 뜨거워졌다.


다이어리에 상담 날짜를 잘못 적은 것이었다. 도대체 잘 지키자고 쓰는 다이어리에 잘못된 정보를 떡하니 써놓으면 어쩌잔말인가. 게다가 써놓은 것도 지키지 못한 데다 그걸로 왕착각까지 했으니... 첩첩산중이다. 다이어리를 써둔 게 오히려 독이 됐다.

나란 여자 정말 다이어리를 못 쓰는 여자다.


휴. 그래도 다행히 약속은 지킬 수 있었고, 누구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나만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는 평생 정리가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인가? 나에게 꼼꼼함이란 사치인 것인가? 하는 난제를 내게 남겼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할지언정 다이어리 기록을 포기하지 않고 도전 할 생각이다. 꼼꼼하지 못한 면이 내 단점이라면 아 난 원래 그런 사람이지. 하고 포기하기보단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다. 개선을 요하는 이 단점들을 보완한다 한들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될 수 없음을 알지만, 그저 남들만큼만, 실수를 줄이기 위한 대비책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력할 것이다.


내 아이들은 자신의 기준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극복하려 노력할까? 인정하려 노력할까? 정답은 없다. 그녀들이 다만 담대하게 자신들의 단점을 받아들이기만 바랄 뿐,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한층 더 잘 키우고 싶기에,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내 단점을 보완하려 노력해본다.






다이어리.


연초에 너는 내게 선물같이 온다.

다짐을 적어 한해를 점쳐본다. 포부를 나열해본다.

10kg 빼기 같은 허무맹랑한 목표들로 빈틈없이 꽉꽉 채워본다.


연말에 너는 내게 반성같이 온다.

일기를 쓴다. 이것저것이 후회되네.

나이는 왜 이렇게 잘 먹나 한탄을 해본다.

연초에 적은 무수한 리스트의 목표 중 한 두 개만 밑줄이 그어진다.

나는 반성을 한다. 좀 더 열심히 살걸, 좀 더 살을 뺄걸.

하지만 또 내년이 있다. 내 삶은 쳇바퀴처럼 잘 굴러가니까.

내년엔 이러지 말자. 또 목표를 적어본다.

더 확실하게. 더 명확하게.


채우지 못한 지난 나의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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