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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Apr 06. 2021

주사가 싫다

보이지 않는 공포

어릴 적부터 대학병원을 분기별로 다녔던 나는 채혈만큼은 자신 있었지만 그 외의 주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공포가 심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어쩌다 계주 선수로 뽑힌 난 운동회 전날까지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가 바통 터치 연습을 했다. 그리고 운동회 전날 결국 몸살이 나 병원에서 엉덩이 주사를 맞고 다음 날 계주를 뛰지 못했다. 하루가 지났지만 엉덩이 근육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연습했는데. 고작 엉덩이 주사 하나에, 털썩!


한 번은 학교에서 예방접종을 맞는데 선생님이 열이 나면 안 맞아도 된다고 하는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주사를 맞지 않겠다는 열의에 진짜 열이 났고, 마침 얼굴도 하얗게 질려 무사히 통과됐다. 나중에 엄마 손에 끌려 보건소에 갔지만. 볼거리로 엉덩이 주사를 맞고 기절했던 적도 있다. 이 모든 게 트라우마가 된 걸까.


예방접종은 이제 좀 나아졌지만 엉덩이 주사는 여전히 힘들다. 힘을 빼라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데 절대 힘이 빠지지 않았다. 결단코 이건 사람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이 이야기로 남편과 한참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시험관 시술로 배에 주사를 놔야 했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 외로 괜찮았다. 첫날은 선생님이 방법을 알려주면서 놔주었는데 오히려 그때가 더 아팠다.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놓았는데 바늘로 살짝살짝 찔러가며 덜 아픈 구역을 찾아 주사를 놨다.

남편은 당뇨로 잠깐 배에 주사를 놨던 적이 있었는데 내가 시험관을 할 때 대신 주사를 놔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아서 자신도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사가 아픈 것보다 내가 직접! 놔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혈당 체크를 위해 손가락 끝에 살짝 바늘을 찌르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자기를 찌를 수 있냐며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혈당 체크를 해주는 것도, 다른 사람이 주사를 놔주는 것도 다 괜찮다는데 난 그 반대였다.  


친구의 손을, 가족의 손을 따준 적이 없다. 한번 찔렀는데 피가 안 나와서 두 번, 세 번 찔러야 할지도 모르고 한 번에 끝내자! 고 세게, 찔렀을 때의 아픔도 짐작할 수 없으니 얼른 소화제를 챙겨주는 편이 나았다. 2021년을 살면서 왜, 굳이 손을 따야 하는 건지.


이 이야기를 친정엄마한테도 해봤는데 역시나, 내가 이상했다. 어떻게 직접 주사를 놓는 게 더 나을 수 있냐고.





어쩌면 타이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이로드롭도 꼭대기에 멈춰 선 순간부터 초를 세어 언제 떨어질지를 알고 난 후부터는 공포가 덜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언제 주사를 놓을지 모르는 긴장감이 극한의 공포를 몰고 왔다. 예방접종이 그나마 괜찮아진 건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언제 놓는지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발바닥에 난 티눈을 아빠가 치료해줬을 땐 그게 그렇게나 아팠다. 20대엔 피가 나는데도 이래야 빨리 낫지 싶어 내가 직접 파고 또 팠다. 아프긴 해도 그게 나았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것! 더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 할 수 있는 것! 내 의지로 가능한 것! 이건 또 의지의 문제네.

 

내가 나를 아프게 하는 건 참을 수 있는 선 안에 있지만 남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건 선 밖에 있었다. 치과만 가도 아프면 손을 들라고 하지만 손을 든다고 치료를 멈추는 건 아니니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무서운 게 아닐까. 미스터 빈처럼 내가 거울 보면서 직접 하면 또 괜찮을 지도.


어쨌든 난 누구나 그런 줄 알았다. 나만 그런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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