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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의주도 미세스 신 Aug 02. 2021

너를 키운 건 팔 할이 당근이다.

친정 엄마는 짐이 집을 점령해버렸다는 식의 하소연을

몇십 년째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는 분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물건 무서운 줄을 안다.


돈을 벌어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을 위한 공간을 사야 한다.

그래서 돈이 더 필요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한다.

또 사람은 늙어 죽어도

그 사람이 소비한 물건은 죽지 않고 남아 지구를 괴롭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무언가를 사는 것이 두렵다.


결혼을 할 때 혼수를 따로 하지 않았다.

남편과 내가 자취하면서 갖고 있던 가구를 합치고,

친정 엄마가 갖고 있던 그릇을 물려받아 살림을 시작했다.


아기가 생기기 전까지 우리는

화이트 모던 인테리어에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요즘 부부' 같았다.

그런데 아기의 등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다.


아기를 낳아 기르는 데에는 수천 개의 물건이 필요했다.

필요한 물건들을 종이에 죽 적어보았다.

침대, 욕조, 기저귀 교환대, 아기띠, 장난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물려받을 것, 새로 살 것, 당근 마켓에서 구입할 것으로 나누었다.


주변에 이미 아기가 커버린 친구와 친척이 있어서

큼직한 물건들과 아기 옷, 신발 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부족한 물건들은 당근 마켓을 이용하기로 했다.


첫아기였고, 마지막 아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예쁘고 깨끗한 새 물건들을 사줘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길어야 몇 달씩 사용할 아기 용품들의 값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게다가 기능과 디자인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아기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부모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육아용품 쇼핑은 조금만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원은 우습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정신줄을 부여잡았고,

남편과 나는 각자 몇 개씩 물건을 맡아 당근 마켓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태가 좋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물건

당근 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기준이다.

먹이를 사냥하는 기분으로 주말마다 여기저기 거래를 하러 다녔다.


거래를 할수록 좋은 물건을 고르는 눈썰미가 생겼고,

중고 물건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이사온지 삼 년 만에 우리 동네의 지리에도 밝아졌다.

물건을 살 때 지킬 우리만의 원칙도 생겼다.

첫째, 싼 값에 현혹되지 말고 정말 필요한 물건만 사자.

둘째, 무료 나눔으로 올라온 물건은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양보하자.


이렇게 우리 아기의 출산 준비를 마쳤고,

지금도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당근 마켓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당근 마켓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질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고,

배송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쓰레기가 생기지 않는다.

또 중고로 구매한 물건은 쉽게 되팔 수 있어서

집에 쌓이는 물건들이 줄어들게 된다.

덤으로 동네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남편은 어렸을 때 느꼈던 동네 사람들 간의 따뜻한 정을 느꼈다고 한다.


구입한 물건들은 깨끗하게 씻고 햇빛에 바짝 말려 사용한다.

당근에서 산 물건 중

우리 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건 역류방지 쿠션이다.

아기를 먹이고 바로 눕히면 게워낼 염려가 있는데 그걸 방지하는 용도이다.

우리 아기는 거의 그 쿠션에서만 똥을 싼다.

새하얗고 둥근 모양이 변기를 닮아서 그런가 보다.


최소한의 물건만 신중하게 들이려 노력했는데도

벌써 아기 물건으로 넘쳐난다.

최소 십 년간 미니멀 라이프는 물건너갔다.

이런 시절도 다 추억이 되겠지...


앞으로 우리 아기가 자라서 졸업한 물건들도

당근 마켓에 내놓거나 주변에 나눠줄 예정이다.

물건이 활발하게 여기저기로 움직여 잘 쓰였으면 좋겠다.


아가야 쑥쑥 자라라! 헌 수영장 팔고, 새 수영장 사 줄게!!


<남편의 참견>

당근은 자본의 늪에 빠진 부모의 사랑을 구해주는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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