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요가 수행자 Dec 14. 2022

코로나를 뚫고 이라크에서 오신 시아버지와의 만남

코로나에서 버틴 임신, 출산, 육아의 시간들 


시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해외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근무를 많이 하셨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일본, 태국, 멕시코를 다녀오셨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아버지는 집에 가끔 오는 존재였다. 신랑은 아버지가 집에 오셨을 때마다 ‘줄넘기 몇 번 하기’처럼 작은 도전과제를 함께 했다고 말했다.


아버님은 환갑과 동시에 퇴직하셨고 우리가 연애하는 동안 일 년 남짓 집에서 쉬셨다. 젊은이들은 다들 어떻게 하면 일을 안할까를 궁리하는데 평생을 일터에서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아버님은 곧 재취업을 하셨다. 역시나 해외로 가는 고된 일이었고 목적지는 중동의 이라크였다. 출국 날짜는 우리 결혼식이 끝난 며칠 뒤였다.


아버님은 4개월에 한 번 한국으로 짧은 휴가를 오셨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도 때맞춰 들어올 수 없어서 가족들이 모이는 날에는 영상통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다 보니 아버님이 한국에 오시는 그날이 가족들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 되었다. 아버님은 면세점에서 대추야자며 커다란 초콜릿을 사 오셨고 온 가족이 모여 고기를 실컷 구워 먹곤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wGvXo34azg


뉴스에 이라크 건설 근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2020년 7월쯤이었다. 이때 한국은 하루 확진자가 41명 정도로 안정된 상태였지만 이라크에서는 매일 3,000명의 가까운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라크 현지 누적 환자는 10만 명이었으니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보면 헉 소리가 나는 엄청난 숫자였다. 확진자가 늘어나자 공사는 곧 중지되었다.


가족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영상 통화할 때 낯빛이 안 좋은 아버님의 모습을 보고 나면 어떻게든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한숨을 쉬었다. 타국에서 일하다가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걸려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정부에서 이라크 근로자의 한국 귀국을 추진한다고 했다.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댓글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받지 마라. 외국인들은 막아서 병상 확보를 해야 한다.’라고 욕을 했다. 나는 보이는 기사마다 외국에서 일하는 우리 국민이고 가족이고 아버지라며 댓글을 달았다. 


기사나 나온 뒤에도 귀국은 쉽지 않았다. 모든 직원을 다 내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고 계약대로 공사도 끝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나온 뒤 몇 달이 지나서야 아버님은 귀국을 할 수 있었다. 겨우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을 때는 공항에서 입국 사진이 찍혀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당시 얼마나 격리가 삼엄했는지 모른다. 아버님은 공항에서 PCR 검사 음성이 나왔음에도 격리시설에서 2주를 보내고 다시 집에서 자가격리 2주를 했다. 매일 보건소에서 연락이 와서 집에 있는지 확인을 했다. 코로나 검사를 여러 번 했지만 모두 음성이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격리가 끝난 후에 일어났다. 어머님한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만나서 이것저것 물건만 주고 바로 가겠다며 지금 집으로 오시겠다는 거였다. 이때는 얼마나 조심했는지 가족끼리 만날 때도 마스크를 꼭 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떠드는 상대는 우리 신랑밖에 없었는데 신랑마저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는 몰랐다. 어른들이 ‘잠깐 만나자’라는 건 집에 들어와서 차도 마시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하고 그다음에 가겠다는 걸. 나는 전화를 받고 쉬다가 머리나 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고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다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짐을 잔뜩 든 어머님과 아버님이 서 계셨고, 아버님은 나를 보자마자 “나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외출 준비가 안 된 건 물론이고 손님 맞을 준비도 안 되었던 나는 어색하게 외식은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머리에 둘둘 감은 수건에서 이미 눈치를 챈 어머님이 다행히도 먼저 나서서 물건만 주고 간다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물건을 받고 현관문을 닫으면서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서 애써 자신을 합리화했다. ‘물건만 주고 가시기로 하셨잖아. 안 그래?’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찝찝함은 외면하면 안 된다. 그건 경고의 표시 었다.


*사진 unsplash

                     

이전 06화 아기보다 내 책이 먼저 나왔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