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Oct 19. 2024

19.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다음날, 눈을 떠보니 해가 이미 오전을 넘기고 있다. 땀으로 축 처진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놓인 물수건이 내 손등으로 떨어진다. 내 눈 앞에 아른거린 물건들이 사방을 어지럽힌다. 눈을 감고 뜨기를 반복하며 은하계 너머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의 사념들을 불러 오고 있다. 불현듯,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섬주섬 손끝에 감각으로 주위의 물건 중 핸드폰을 찾는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관념은 핸드폰을 꼭꼭 숨겨 놓는다. 손으로 휘저으며 만진 물건들은 바닥으로 낙마하자, 방문을 열고 어머니가 들어오신다. 

-뭐해?

-핸드폰 어디 갔지?

-베게 옆에

나는 뒤돌아 내 베개를 보자 놓여있는 핸드폰이 보인다. 핸드폰의 암호를 풀기 위한 선을 잇는 손가락이 엇갈린다.

-아침에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전화가 왔어. 어제부터 네가 연락이 안 된다고 그러더라, 내가 지금 몸이 아파서 누워있다고 말했더니 본인이 너 팀장에게 연차라고 얘기 할 테니 푹 쉬게 두라고 하더라. 

나는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는다.

-왜 비 맞고 돌아다녀?

-그게, 아버지 보러 갔어. 저 기타 아버지 꺼야.

이미 아버지의 기타라는 것을 알고 계신 어머니의 흔들리는 동공이 보인다. 입 안이 달았는지, 아니면 못 다한 물음이 있는지 입을 오물거린다. 한참의 공백이 지나서야 어머니가 툭 내뱉는다.

-잘 살고 있더냐?

-어, 잘 살아.

-그래?

-토요일에 남자친구가 인사하러 오고 싶데. 그때 아버지 오라고 해도 돼?

어머니는 창밖 너머의 실오라기 구름을 바라본다. 애수의 젖은 눈빛, 어머니는 답 대신 방 벽에 기대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젠 그대를 몰라요.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 그렇게 보고 싶던 그 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 그대의 허탈한 모습 속에 나 이젠 후회 없으니 /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만약 아버지의 재혼이 내가 어머니를 기만한 것임을 안다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시 재혼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아버지에 향한 그리움에 내가 재를 뿌린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미안하다. 애상함에 잠겼던 어머니는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듯 옷을 털며 일어선다.

-죽 가져 올게.

어머니가 방문을 나간다.

약기운에 잠이 들었는지 온몸이 축 쳐진 빨래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보자 해가 지는 중인지 방안에 그을음이 남아 있다. 온몸에 흘린 식은땀,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 몸살이 나아지자 온몸이 한결 개운하다. 화장실 갈 요량으로 몸을 일으켜서 방문을 열어젖히자 뜻밖에도 준호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다. 급히 마렵던 소피도 들어가 버리고 부랴부랴 거울을 보며 얼굴에 로션을 바른다.

-그냥, 나와도 돼.

준호의 목소리가 방을 타고 들어온다. 화장은 하면 할수록 얼굴이 누렇게 변질된다. 손놀림을 놀려가며 대충 얼굴을 정비한 뒤, 집에서 입을 일 없던 원피스를 입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아하게 방문을 나선다.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괜찮을 일 없는 내 상태가 걱정된다.

-아버지는 잘 만나고 왔어?

-네.

나는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살피기 위해 부엌 안을 흘기자 과일바구니가 눈에 띈다.

-매번 이 집 앞에 너를 내려 주고 갔을 때, 내부가 궁금했었어. 집안이 아늑하네.

-오빠네 집에 비하면 작아요.

-아니야, 집안 구석구석마다 정감이 느껴지는 걸. 저거 턴테이블 아니야? 

준호는 몸을 일으켜서 거실 한쪽 벽면에 있는 레코드플레이어 옆 LP판을 본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부터 엘비스 프레슬리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은 LP판을 그는 흥미롭게 관찰한다.

-아버님이 음악도 좋아하시는구나.

-네.

그는 꺼내보던 LP판을 다시 자리에 넣는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본 뒤 돌아갈 차비를 한다.

-얼른 들어가서 자, 나 이만 갈게.

어머니가 쟁반에 받친 과일 접시를 들고 나온다.

-가려고?

-네, 회사 업무가 아직 안 끝나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조심히 가시게.

-이번 주 토요일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때 보세.

그는 내게 현관문 밖으로 마중 나오지 못하게 막은 후, 손을 흔들며 대문 밖에 있는 자동차에 오른다. 그의 자동차 엔진소리가 문을 열어놓은 베란다를 넘어서 들린다. 그가 골목길 너머로 사라진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평일의 일상처럼 어머니가 깎아 놓으신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킨다. 시간은 7시 30분경, 어제 아버지와 했던 약속이 스친다. 나는 일어나서 차키와 지갑을 챙긴다. 어머니가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나오다가 나를 보고 묻는다.

-밤이 다 되어 가는데 어디를 갈려고?

-잠깐 가볼 데가 있어. 금방 올게.

나는 현관문을 열고 대문너머로 달려간 후, 차 문을 열고 잽싸게 운전석에 오른다. 헤드라이터를 키고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오늘따라 신호가 길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도로가 막혀서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은 8시를 향해 가고 있다. 차를 몰고 사거리에 도착하자 아버지가 내가 올 것으로 예상한 도보를 바라보시며 서 계신다. 나는 보조석에 창문을 내려서 아버지를 향해 소리친다.

-아버지 차 타세요.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음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먼 곳만 응시하신다. 나는 짧게 클락션을 두 번 누르자 그제야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시고 보조석에 타신다. 아버지가 안전벨트를 매자, 엑셀을 밟는다. 

백화점 안, 아버지는 내 뒤를 따라오시고 나는 주도적으로 남성 신사복 매장에 들어간다. 나는 눈에 띄는 몇 벌을 고른 후 아버지에게 입어 보시라고 권한다. 어색한지 주위를 살피던 아버지에게 한 번 더 권하자 마지못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아버지가 옷을 바꿔 입고 나오길 기다린다. 아버지가 양복을 차려 입자, 방금 전 후줄근한 모습보단 낫다. 상견례와 결혼식까지 고려한 양복 세벌과 와이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고른다. 아버지의 양복 위에 여러 가지 넥타이를 견주어 보자 아버지가 어색한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아버님 좋으시겠어요. 따님이 직접 넥타이도 골라주시고~

긴장한 아버지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신다. 아버지가 넥타이를 메는 사이에 계산대에서 내가 카드로 결제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만류한다.

-이건 내가 낼게.

-아니에요.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나는 아버지가 다가오시기 전에 재빠르게 계산한다. 양복이 포장된 꾸러미를 아버지가 드신다. 

나는 남성 구두 전문 매장으로 가자마자, 점원에게 눈에 띄는 구두 몇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점원이 나의 수신호에 따라 재빠르게 구두를 꺼내 온다. 뒤에서 따라오던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서 낡아 빠진 운동화를 벗어버리고 구두를 신는다. 양복에 구두를 신으니 그나마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 판별되지 않는다. 나는 구두 세 켤레를 포장하고 결재를 한다. 아버지는 다른 구두로 갈아 신느라 내 결재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이제 이런 상황을 즐기시는 건지, 내가 결제할게라는 빈말조차 없다. 

내가 시계 매장으로 앞서 가자, 아버지는 양복과 구두를 들고 따라오신다. 나는 아버지가 매장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고른 시계를 점원에게 요청한다. 점원은 유리 안에 갇힌 시계를 꺼내 내게 내민다. 아버지가 도착해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나는 아버지 팔목에 시계를 채운다. 점원이 시계 금액을 말하자 나는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한다. 아버지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잇는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비싼 걸 사느냐? 니 옷이나 사지~ 

나는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 대신 영수증에 서명을 한다.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아버지의 옷 매무새를 점검한다. 점원이 보증서와 케이스를 건네자 아버지가 짊어진다. 그때, 아버지 움직임에 펄럭이는 넥타이가 눈에 거슬리자 주얼리샵으로 간다. 아버지의 넥타이핀을 선별하고 점원이 꺼내준 넥타이핀을 아버지의 가슴팍에 꽂는다. 아버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점검한다. 아버지의 삐죽삐죽 솟은 머리가 띄고, 나는 점원에게 근처 미용실 위치를 묻는다. 

아버지는 유명한 헤어숍에서 전문 헤어디자이너에 의해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을 털어내자 10년의 세월이 감춘 아버지의 멋스러움이 풍겨난다. 어머니가 반했을 아버지의 모습, 나이가 먹어서 주름이 파여도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준수한 외모가 나의 거짓말을 안도하게 만든다.

내 차를 타고 아버지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는 중, 아버지는 창밖을 보다 입을 연다.

-네가 잘 살고 있구나.

-그럼요, 대기업에서 돈 벌고 잘 살고 있죠. 

-그나마, 다행이네~

-왜요? 돈 필요하세요?

-아니, 네가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돈 필요 없어. 이젠 기타 칠 수 없으니깐.

아버지는 자신의 왼손을 황급히 감춘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다시 무대에 설수 없다는 좌절감, 돌아오지 못한 강을 넘은 느낌, 자신의 인생이 한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서고 싶은 갈증, 자신의 음악을 타인에게 공유하고 싶은 작은 바람을 가진 죗값이 아버지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누구에도 자신의 마음속에 용솟음치듯 품어 나오는 울분을 표현하지 못한 채 속을 삼켰겠지, 아버지는 그렇게 꿈을 잊은 보통의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의 빌라 앞에 차를 정차한다. 아버지가 보조석에 내리자 나는 뒷자리에 꺼낸 오늘 산 쇼핑백들을 아버지 손에 건네준다.

-조심히 가세요. 이 옷 입고 토요일 낮 12시 집으로 오세요.

아버지가 빌라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돌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