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모방 시를 쓰기로 했다. 갑자기 '뜨악' 해진다.
어릴 적 시를 듣고, 읽고 감상에 젖어서 눈물 흘리고, 감동받아 몇 날 며칠이고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혼자 감동에 젖어 나만의 창작을 해보고 '와, 나도 이 정도면 시를 써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 들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시를 읽었던 때가 언제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감성도 감정도 메마른 나의 현실이 더욱 힘들게 했다. 시를 감정 없이는 쓸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브런치에 올린 작가들의 시를 읽고 그 안에 감동도 받고 위로도 받았다. 하지만 어릴 적 가졌던 풋풋한 마음의 감성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이런 나에게 모방 시를 쓰라 한다.
고민하게 되었다. 하물며 나의 연대기를 써보라고 한다. 더더욱 쓸 수가 없다.
별 것 없는 나의 인생,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와 나의 연대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짧고 굵은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철 시인의 「그 아이의 연대」를 가지고 나와 아빠의 모방 시를 쓰려한다.
1977년 3월 어느 날
음력 삼월 보름 햇살이 따사로운 날
봄을 알리듯 여자아이가 태어나다
우는 아이 보고 모두 웃다
아들이면 얼마나 좋아! 한다
1982년 6월 어느 날
막냇동생이 저녁 무렵 집에서 태어나다
응애 우는 아이 아들이다.
방문 밖에서 여자아이 첫아기 울음소리 듣다
아들 바라던 아버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다
1985년 추운 어느 겨울날
감기에 걸려 못 먹는 여자아이 엄마가 끓인 보리차만 먹다
열 떨어지니 입에서 달달한 거 달라고 성화다
아빠가 달콤한 사과 스푼에 갉아서 내 입에 넣어준다
여자아이 세상에서 사과만큼 아빠가 좋다
1987년 찬바람 불던 어느 날
엄마가 집을 나갔다 여자아이 엄마 잘 나갔다 했다
두어 달 동안 어린 동생들 씻기고, 밥 해 먹이고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다
엄마가 나가면서 준 쌈짓돈 동생들과 과자 사 먹다
1989년 어느 뜨거운 여름날
아버지 집을 나가셨다. 무엇이 못마땅해 나가셨나
어린 자식들, 아들 낳은 마누라 두고 무엇을 위해 나가셨나
밖에 어여쁜 여자가 있었나 보다
여자아이 차라리 잘 되었다 한다
1991년 어느 추운 겨울날
학교 갔다 와 교복 블라우스 손빨래하다 이상했다.
머리가 핑 돌고 매스껍다 현관문 열고 창문 열고 그대로 쓰러졌다
눈을 뜨니 낮잠을 그리 잤냐 한다
냉큼 일어나 엄마가 준 동치미 한 대접 마셨다
1993년 쌀쌀한 어느 날
중3 가을 원서 쓰라고 선생님들 성화 시다
여러 학교에서 홍보하러 왔다 그중 산업체 학교 신세계를 보다
원서는 산업체 학교를 선택한다.
공부가 웬 말이야! 여자아이 “현명한 선택”을 하다
1996년 햇살이 따스한 봄날
고된 3년 돈 벌고 공부 마치며 졸업하다
서로 밀가루 달걀 뿌리며 환호하다
잘했다 하며 친구들과 부둥켜안고 울다
마지막 목욕탕에서 밀가루 달걀 걷어내며 서로 울며 씻다
1998년 무더운 여름
여자아이 옆을 보니 가엾은 힘없는 여인이 있었다
이혼 도장 찍어오겠다 하며 호기롭게 아버지에게 갔다
이혼해 달라고 하니 안된다 한다 이기적이다
호적이 뭐라고 앞으로 볼 일 없다 큰소리치고 나오다
2000년 습하고 햇살도 강한 여름날
중환자실에 주삿바늘 꼽고 호흡기 달고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던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연락받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흐른다
좋은 아버지도 못되면서 원망도 못 하게 일찍 가시네 하며
여자아이 기가 차서 하늘 보고 눈물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