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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둥새 Dec 24. 2020

게임

니미츠 제독의 리더십

한창 게임을 자주 하던 시절, 나는 내가 게임을 잘하는 줄 알았다. 당시 게임을 같이 하던 친구들이 잘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잘하는 편이었기에, 게임을 할 때면 내가 리더 역할을 맡았다. 친구들의 게임 실력과 그 친구가 선택한 게임 캐릭터에 따라 위치를 지정해주고, 어느 한 곳으로 집합하라고 말하고, 공격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이나 방어에 전념하라고 말해주는 등의 역할을 내가 맡았다. 그래도 이기는 횟수가 지는 횟수보다 적지는 않았기에 계속 리더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능력은 둘째 치고, 리더십은 꽤나 나쁜 축에 속했던 것 같다. 친구의 돌발행동에 왜 그랬냐고 비난하는 것은 예사였다. 내가 제시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친구에게 너 때문에 망했다며 몰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판단 실수로 잘못 제시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 판단 실수가 아니라 너네 능력이 모자라서라며 바락바락 우겨댔다. 게임이 잘 풀리면 내가 게임의 흐름을 잘 읽고 잘 판단해서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잘 풀린 날은 덜하지만, 잘 안 풀린 날은 게임이 끝나면 언제나 투닥투닥 대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 날 새로운 친구 한 명이 우리의 게임 멤버로 영입이 되었다. 그 친구는 게임을 정말 잘했다. 같이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나를 포함한 우리 기존 멤버들과의 실력 격차가 꽤 크게 느껴지는 친구였다. 그렇게 자연스레 리더 역할도 그 친구에게 넘어갔다. 물론 대놓고 티는 안 냈지만 자존심이 상한 나는 꽁해있는 상태였다.


그 친구가 리더를 맡으면서 게임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게임 실력은 둘째 치고, 나와는 달리 게임 중에는 절대 비난하지 않고, 잘한 행동에 대해서 칭찬만 했다. 누군가 실수하면 이렇게 하면 좋았을 거라고 얘기하며 피드백을 해주고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꽁해있던 내가 유독 말을 잘 안 들었지만 계속 어르고 달래면서 집단행동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간혹 내가 이전처럼 리더 행세를 하려고 했는데,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같이 동참도 해주었다.


그 친구는 그 시절에 이미 이런 팀 게임에서 이기는 법을 어느 정도 깨우친 듯하다. 게임 진행 중에 팀원을 비난해봐야 불화만 발생할 뿐 별 도움이 안 된다. 칭찬하고 격려하고 피드백을 주면 팀원 간 결속력이 강해지고,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물론 게임이 끝나면 그 친구도 딱히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니탓 내 탓하며 서로 투닥거리고,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하며 자신이 잘한 점을 뽐냈다. 하지만 게임에서만큼은 나보다 훨씬 괜찮은 리더였다. 당시의 나도 니미츠 제독에 대해 조금만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리더십을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전쟁의 주역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 육군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독선적이고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으나, 해군 제독이었던 니미츠는 맥아더와 정반대로 조용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상관과 부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따르는 덕장이었다. 그래서 당시 미 육군과 미 해군의 대립은 상당했음에도 니미츠 제독은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였다. 제아무리 대립관계라 하더라도 전쟁 중에 아군을 비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함대를 자신이 평소 눈여겨보던 이들로 구성하였기에 부하들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강했다. 그렇기에 큰 그림은 자신과 사령부가 짜더라도, 지휘관들이 전투에 돌입하면 그 상황은 모두 해당 지휘관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와 같은 결과물로 돌아왔고 결국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이후로는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참모총장에까지 올랐다.


니미츠 제독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는 오거스타 호의 함장을 맡았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니미츠가 처음 함장으로 왔을 때 오거스타 호는 최악의 상태였다. 장병들은 초짜에, 함선의 관리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고, 배치 지역은 미국에서 굉장히 먼 중국이었다. 하지만 니미츠는 불과 1년 사이에 이들을 최고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단 1년 사이에 오거스타 호의 장병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함선은 최고의 상태를 유지했으며, 장병 중 일부는 동양 전문가를 꿈꾸며 배치 지역이 중국이라는 점을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이들을 독촉해서가 아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이들의 동기를 유발해서이다.


게임에서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는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강렬한 리더십이든, 부드러운 리더십이든 게임을 이길 수 있게만 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내 리더십은 오히려 게임을 불리하게 만드는, 리더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요소였다. 상황 자체를 더 크게 보면 최악의 리더십이었다. 우리 게임 멤버는 다 친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게임 실력도 같이 성장해나가는 사이였다. 니미츠가 오거스타 호의 장병들을 성장시킨 것처럼 나도 친구들은 물론 나도 같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다. 반대로 게임만 끝나면 서로 남 탓하며 싸우기 바빴으니 얼마나 최악이었을까.


뒤늦게 들어온 새로운 멤버가 리더 역할을 맡으면서 게임이 전보다 재미있게 풀렸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결국 크게 싸우고 퇴출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름대로 반성을 하면서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못하는 이 친구들에게 당시의 나는 어땠는지 물어봤다. 다행히도 친구들은 내가 리더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면... 당시에 나만 혼자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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