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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순 Sep 17. 2023

예상하는 삶, 시시하잖아

-월간 정상순 9월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네. 맞습니다. 노래 제목입니다. 많이 옛날 노래입니다. 가을이잖아요.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유튜브 뮤직으로 검색해서 한 번 듣고 9월호 제목을 이 노래로 결정했습니다. 이번호는 '테이블 낭독'으로 진행합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읽고 싶은 글을 '낭독'하기, 이것이 테이블 낭독입니다. 저는 홍은전 작가를 애정하는데요, 저보다 백만 배 더 홍은전 작가를 애정함에 틀림없는 고병권 님의 글 <두 번째 사람 홍은전>을 낭독하려고 합니다. 각자 낭독하고 싶은 글을 가지고 오시면 좋고요, 아니면 테이블 주변의 책꽂이에서 원하는 책을 골라 낭독하셔도 좋습니다. 노래를 부르시거나 춤을 추셔도 좋아요. 여름 동안 모두 애썼으니 가을맞이 해 보아요.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남은 사랑을 나눠 보아요. "


이번 호는 좀 편하게 가자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9월호를 진행하는 장소조차 집으로 정했다. 6인용 탁자에 둘러앉아 차와 사과가 잔뜩 들어간 비건 케이크를 준비하면 별 다른 연습은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늦어도 한 달 전에 홍보를 시작했는데 이번엔 고작 일주일을 앞두고 신청서를 공개했다. 9월호 구독을 신청한 사람은 세 분이었고, 뭐, 이 정도 인원이라도 좋다 여겼다. 한데 발행 전 날, 세 분 중 한 분이 참석이 어렵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진행자인 나를 포함해 세 명이라도 충분했을 것이겠지만 조금 다른 선택을 해 보고 싶었다. 2021년 마을에서 한 달에 한 번 공연을 올리겠다고 월간 정상순이라는 플랫폼을 만든 이후로, 나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발행을 중단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기'를 모토로 삼고 있는 요즘의 나라면 가볍게 연 판인 만큼 가볍게 닫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은 두 분의 신청자에게 발행 취소 문자를 보내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씨유 어게인이라는 화답을 받았다.


일요일 하루가 통째로 나에게 주어졌다. 널럴하고 여유 있고 무엇을 해도 안 해도 좋을 하루가. 뭉치와 아침 산책을 하고 태극권 음악을 틀어 놓은 다음 보이차를 마시며 태극권 연습을 했다. 수요일에 있을 세미나 교재도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사과 손질을 시작했다. 삼분의 일은 깍둑썰기를 하고 나머지는 반달 모양으로 썰어 설탕에 조리고 계핏가루로 옷을 입혔다. 두유와 식물성 기름과 우리밀 가루 베이스에 설탕 조림을 섞어 넣고 반달모양 사과를 얹어 키 작은 케이크를 구웠다. 케이크를 구운 김에 동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케이크를 구웠으니 티타임을 가져요' 2시에 만나기로 하고 나는 꺼내놨던 표고와 미리 불려 놓은 쌀을 달달 볶아 비건 버섯 리소토를 만들기 시작했다. 점심으로 먹고 티타임에 집으로 올 친구들과 조금 나눠 먹어도 좋겠다 싶었다.


리소토를 한 술 뜨고 있는데 낯익은 이들, S와 L이 집으로 들어섰다. 평소에도 편하게 드나드는, 확장된 가족과 같은 이들이기에 "먹을 복 있네." 하며 환대했다. 한데 뭔가 기운이 달랐다. 물 한 잔 마시러, 잠시 마루에 드러누우러 올 때의 기운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월간 정상순 9월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구독 신청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온 거야? 헐, 신청자 세 명이라 취소 어쩌고...'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 참이었다. 마당 저편으로 시선이 갔다. 낯이 익기도 하고, 엄청 낯이 설기도 한 그러나 내가 아는 분임에 분명한 한 사람이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 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는 지지난 주부터 진행하고 있는 낭독 프로그램의 참가자인 W였다. 지난주 프로그램에서 9월호 홍보를 잠시 했더랬는데 그걸 기억하고 오신 모양이었다... 고 생각했으나 W역시 9월호 구독 신청자였다. 발행 전 날 신청자를 확인했고, 확인했을 때 세 분이었고, 한 분이 취소하셨고, 그에 발행 자체를 취소한 터였다. 하지만 친히 뭉치네를 방문하신 세 분은 내가 취소 문자를 보낸 다음 구독 신청을 하셨고 나는 미처 그 새로운 세 분의 신청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대참사였다. 여유 있던 하루가 심장 졸리는 순간으로 터닝하는 찰나였다. 식은땀이 났다. 십 년만 더 젊었을 때 이런 일을 겪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힘을 빼고 오는 일을 받겠다고 마음먹은 쉰셋의 나는 조금 달랐다. 마침 케이크가 있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당도한 마을 친구 I가 가져온 커피콩이 있었다. 낭독하겠노라 마음먹은 글이 있었으며 방문객 넷 중 두 사람이 함께 나눌 글을 들고 왔다.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고병권 님의 <두 번째 사람, 홍은전>을 읽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손을 뻗었을 때 소매를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이들이라는 문장을 기억했다. <엄살원>의 두어 단락을 읽으며 당사자성과 조력자의 위치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도 읽었다. 스스로 지고 가야 할 것과 뒤에 남겨 두어야 할 것들에 대해,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하듯 노래하는 작가 이슬아의 <아무튼, 노래>도 읽었다. 정미조의 <눈사람>을 들으며 조금 서둘러 눈 오는 밤을 설레했다. 살짝 양이 부족할 뻔했던 비건 사과 케이크도 야무지게 나눠 먹었다. 티타임을 즐기러 왔던 I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려 커피 리필을 자청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두 번째 커피도 다정하게 나눠 마셨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다음도 기약했다. 각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가지고 와서 사연을 나누기로 했다. 오늘 모임을 위해 책을 들추며 문장을 찾아내던 순간이 소중했다는 소감에 많이 공감했다. 아무도 다음을 기대하지 않았던 모임에서 다음을 약속하는 다정함을 주고받았다.


예상할 수 없는 삶의 통제 가능성에 대한 선망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환희를 놓칠 뻔했다. 이 환희를 만끽하게 해 준, 내가 놓칠 뻔했던 이들에게 축복 있으라.


추신 : 결과적으로 구독 신청 취소를 종용하고 만 두 명의 신청자에게 심심한 사과를. 다음에, 개인적 사정으로 취소하신 분을 포함해서 또 다른 다정함을 만들어 보아요. 살만한 삶은 이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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