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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Dec 08. 2021

모든 것이 아름답던 날

짧은 죽음들을 경험하다

살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태어나자마자 ABO식 혈액 부적합으로 전신 교환 수혈을 했을 때, 그리고 독일 유학 중 욕실에서 한 번, 첫째를 낳은 후 한 번, 둘째 낳은 후 한 번. 그리고 사랑하는 동생이 수술하던 날 한 번씩 정신을 놓고 기절했을 때.

쓰러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여러 병원을 다녀봤지만 어디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찾아주지 못했다.

뇌파검사, 초음파 검사, MRI까지 찍어봤지만 심장에도 뇌에도 이상은 없었다. 이상이 없다니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다행인 건 몇 번 경험을 하다 보니 쓰러지기 전에 어떤 전조 증상 같은 것이 있어서 이제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몇 번의 쓰러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은 둘째를 낳고 새벽에 쓰러졌을 때였다.

몸이 너무 아팠던 날, 겨우겨우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곧 쓰러질 것 같다'라고 생각한 순간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차가웠고, 귀에서는 쿵, 쿵, 심장소리가 들렸다.

뭔가 처음 경험하는 생경한 몸의 느낌. 혹시 죽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눈을 떠보니 바닥의 무늬가 보였다. 입에서는 비릿하게 피 냄새가 느껴졌다. 이가 얼얼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 그렇게 옆으로 누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바닥이 보이는 것을 보니 죽은 건 아닌데, 몸의 상태로 봐서는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잠시 정신이 들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했던 그때의 생각과 흐름은 이랬다.

1. 새벽에 쓰러져서 다행이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쓰러졌으면 얼마나 들 놀랐을까!
2. 그동안 참 감사한 삶을 살았다. 받은 게 너무 많은 삶이었다.
3. 지금 죽는다면 남겨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아빠가 있다. 안심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4. 죽은 후 갈 곳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정을 주는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구나.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감정은 이런거구나.
5. 맡았던 일들이 잘 정리되어야 할 텐데. 나 말고도 잘 맡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지기를. 주변에 좋은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6. 덤으로 살았던 삶, 감사하게 마칠 수 있어 기쁘다.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다 보니 점점 몸이 따뜻해졌다. 발 끝을 움직여보니 조금 힘이 들어갔다. 손 끝도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보았다. 아, 살았구나!

일어나서 쓰러져있던 곳을 보니 너무나 절묘한 위치였다. 조금만 왼쪽으로 쓰러졌으면 싱크대에, 오른쪽으로 쓰러졌으면 붙박이 식탁에 몸을 부딪혀서 크게 다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있던 곳은 싱크대와 식탁 사이, 딱 그곳이었다. 

욕실 문 앞이 마지막 기억인데, 거기에서 만약 정면으로 쓰러졌다면 싱크대와 크게 충돌을 했어야 했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걸어 나와서 냉장고에 가다가 쓰러진 걸까? 지금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창백했다. 그래도, 아직 남은 생애가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정말로 죽을 수 있었는데 뭔가 할 일이 더 남아서 또다시 덤으로 삶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에 묻은 피를 닦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다시 조심스레 안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아이들 잠자는 쌔근쌔근 숨소리가 얼마나 예쁘던지. 다시 듣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 소리를 귀로 듣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푹 자고 일어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새 삶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뺨에 느껴지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떠다니는 구름도.

내 앞에 끼어들려는 차 조차도 감사했다.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이 행복했다.


짧은 죽음들을 경험하며 살아온 시간들.

누군가 미워지려 할 때나, 밀려드는 일에 숨이 막힐 때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다시 한번 떠올린다. 그날 밤의 기도를,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의 감격을.

살아있기에 느끼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한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지만 앞으로 남은 생애를 사랑으로 채우고 싶다.

덤으로 받은 삶, 남 주기 위해 공부하고, 남 주기 위해 살고 싶다.

그런데 오늘도 사랑을 받아버렸다. 

한창 수업하느라 바쁜 시간, 둘째랑 놀아준다고 데리고 가주신 둘째 친구 어머니께.

먹을 거 없을까 봐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신 분께.

엄마 대신 동생의 받아쓰기 시험을 챙겨준 첫째에게.

논문을 쓰는 동안 따뜻한 라떼를 사다 준 남편에게.


내일은 내가 더 사랑해야지. 다짐해본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삶. 내일도 눈을 뜨면 모든 게 아름다웠던 그날 아침을 떠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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