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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Sep 18. 2023

벌킨과 아줌마가 된 나.

과거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사람마다 어린 시절의 환상을 상징하는 물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 곰씨에게는 마틴 기타가 그런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상징이 있다. 바로 벌킨이다.


사람들이 가방을 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벌킨 사랑은 어렸을 때 온스타일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온스타일에서 방영되던 세련된 미국의 리얼리티나 부자의 삶에는 언제나 귀여운 벌킨이 함께했고 어린 나에게 벌킨은 부유함의 그 이상. 거대한 뉴욕 도시를 가로지르는 멋지고 세련된 도시여성. 언젠가 되고 싶은 그런 여성의 상징이었다. 이 환상이라는 것이 지금은 얼마나 멍청하고 바보 같은 것인지 - 어떠한 경로로 자본주의가 나에게 그런 환상을 만들어내고 소비를 촉진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벌킨은 내가 샤넬로 환상을 가득 채우는 동안에도 - 샤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얼마 전에 첫 벌킨을 손에 넣으면서 어린 여자아이 때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날은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이 가득한 하루였다. 1년 동안 일방적으로 나와 곰씨에게 연락을 끊은 시어머님께 문자로 원자폭탄을 날리고 딸로서, 며느리로서의 내 인생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고찰하고 있던 중이었다.


글로 쓰자면 대하서사시 급인 - 남편 대신에 가장으로서 삶을 책임지고 있는 나의 한탄과 분노와 2년 동안 삶에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 가득했다. 그 2년 동안의 스트레스가 터지고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삶에 하루종일 시가로도 풀리지 않는 복잡한 마음을 느끼던 차 벌킨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하루는 정말로 지옥과 지옥을 견딘 뒤에 꿈을 이루는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어쨌든 그 고생을 하고 손에 들어온 벌킨. 원래 내가 원하던 색깔 하고는 많이 달랐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갈색이었다. 나에게는 고민할 틈도 없이 그냥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 얼마나 멍청한 소비인가 싶어도 그래도 벌킨이지 않은가.


누군가를 위한 소비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한 소비는 오랜만이라 정신이 멍하면서도 그동안 집안을 굴리기 위해서 노비처럼 일했던 스스로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소비는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가장이기 전의 나 스스로가 생각난다.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했는데, 그러니까 결혼 전에는 뭐든지 내가 원하는 데로 세상을 굴릴 수 있었다면 결혼 후의 나는 정말로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엄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벌킨을 애타게 원했던 어릴 때의 나와 벌킨을 손에 넣는 나 사이의 엄청나게 느껴지는 갭에 나는 잠시 스스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우스갯소리로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라는 말이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지만 그 말 이변에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가장의 몸부림이 섞인 말일 것이다. 그들도 혼자 살 때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청운의 꿈이 있었겠지만 결혼한 후에는 게임 세일 때를 기다리거나 용돈으로는 담배를 겨우 사 피거나 한 달의 술 한잔밖에 할 수 없는 나라는 사람만이 남는다.


아마 이혼하기 전까지는 다시는 나는 꿈이 가득하던 - 그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나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고양이가 20마리나 있고 책임져야 하는 가정이 있다.

자유로웠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분명 다른 것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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