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바라본 하늘
엄마는 병원에서 마지막 삶을 보냈다. 나와 남은 가족들 입장에선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엄마에게도 그랬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말기 암 환자에게 6인실 병동은 턱없이 부족한 게 많은 공간이었다. 옆자리의 보호자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민간요법을 자꾸만 입에 올렸고, 엄마는 자주 흔들렸다. 엄마의 흔들림은 아빠와의 언쟁으로 잘 번졌다. 들어주지 않는 아빠에게 엄마는 배신감을 느꼈고, 아빠는 굳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 도닥여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의사가 말한 남은 시간이 소모될수록 말을 잃어갔다. 아니, 본인은 말을 하는데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고통이 심해져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해서인지, 병이 더 악화하여서인지 말을 점점 어눌하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를 보러 잠시 들른 날 엄마는 약과 병에 취해 잠만 잤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보다 옆자리 보호자의 신세 한탄을 더 많이 들었다.
“내 인생이야말로 참 기구하지. 작년엔 아버지 돌아가시고 올해는 어머니고...”
저기요, 옆자리에 시한부 환자 누워있으니까 자제해주시겠어요? 하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엄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자는 모습이 나름 평온했다. 그 얼굴을 보자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소리에 엄마를 핑계 삼았단 걸 깨닫고 분노를 가라앉혔다. 정말 핑계였다. 엄마를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이 상황에 놓인 내가 싫었고 눈 한 번 맞춰주지 않는 엄마가 싫었다.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엄마는 그날 끝까지 나와 어떤 대화란 것을 하지도, 손을 먼저 잡아주지도 않았다. 이게 마지막 즈음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던 내가 열심히 엄마와 손을 잡고 만져보고 사진을 찍어뒀을 뿐이었다. 당연했던 존재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그렇게 했다. 이걸 모녀지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엄마가 마지막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병간호는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 대신 휴학한 언니와 아빠가 5일씩 번갈아 가며 병실을 지키는 것으로 했다. 나는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자 시간이 날 때면 엄마를 가끔 보러 갔다. 그래서 엄마는 딸 중에 언니에게 더 정이 갔던 건지 내가 병실을 찾았을 땐 다정한 인사 한번 없었다. 매일같이 오지 않았던 내 잘못이었을까. 내가 애써 애교 부리며 인사를 건넸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왜 왔냐. 뭣 하러 왔냐.”
그러고는 얼른 돌아가라는 듯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말할 힘이 없으니 자신의 언짢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정을 쓰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프고 나서 감정 표현에 더 솔직해졌다. 싫으면 얼굴에서부터 드러났고, 암성 통증 때문에 그리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좋다면 별 말없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건 모두 언니와 아빠에게 해당하는 일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다가가는 순간과 엄마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항상 달랐다. 그리고 내가 병원에 엄마를 보러 가는 날은 ‘내가’ 엄마에게 다가가는 날이었다. 엄마는 병원에 오는 날 매번 달가워하지 않았다. 막내딸 좀 반겨달라는 아빠의 말은 오히려 날 뻘쭘하게 만들었다. 평소에 얼마나 못했으면 엄마가 안 반겨준대.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엄마는 병원 복도 끝 창가로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러 나가곤 했다. 한 번은 엄마의 산책에 뒤따라 나간 적이 있다. 엄마는 여전히 날 반가워하지 않았고 별말이 없었다. 물을 달라거나, 다리 좀 주물러달라거나, 휠체어 좀 끌어달라거나, 그런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창밖을 계속 봤다. 덩달아 나도 창밖을 바라봤다. 날을 추웠고, 면역력이 떨어진 엄마에게 찬바람은 치명적이기에 창문도 안 열고 바라본 겨울날이었다.
난 여전히 생각한다.
그날, 엄마는 내게 마지막 당부의 말이나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엄마가 바라본 마지막 이승의 하늘이었다. 이제 와 그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다. 그 생각에 내가 들어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