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별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고,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필요한 일을, 이치에 맞게 한다. 남을 위한 쓰임에 자신을 소진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고 돌보는 일을 소중히 한다. 정성과 성찰로 마련한 힘으로 관계와 일의 흐름을 매끄럽게 가속하거나, 자연스럽게 진로를 변경한다. 이목을 끌려고 빠스랑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이런 존재감은 깊고 은은하다. 아름답다.
풍수원성당은 비켜선 곳에 자리한다. 200여 년 전 가혹한 세상에서 비켜선 땅에 터를 잡았고, 지금도 서울과 강릉을 잇는 6번 국도에서 비켜선 자리에 서있다. 양평과 횡성을 거쳐 강릉, 정선, 동해, 삼척, 영월, 태백 쪽으로 갈 때, 6번 국도 상에서 이 성당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곳을 사람들이 찾아온다. 아름답고, 정갈하고, 작지만 도저한 존재감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성당이 여기 있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주 지나치던 곳을 찾아간다. 해가 나는 날인데, 밝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줄기가 굵지 않고, 오래갈 것 같지 않다. 비가 맑다. 해를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며 내린다. 레인재킷 없이 그냥 달린다. 풍수원에 도착한다. 성당에 가깝게 마을 주차장이 있지만, 마을에서 떨어진 국도변 대형차 주차장에 모터사이클을 세운다. 모터사이클은 배기음이 높고 빠르다.
성당 마을은 지형적으로 궁벽하고 좁은 땅이다. 뒤쪽으로 800미터 가까운 금물산과 성지봉, 앞쪽으로 700미터 가까운 매봉산이 만나는 좁은 계곡 저지대가 서원면 유현 2리 마을이고, 여기가 성당 마을이다. 서쪽 서울 방향은 도둑머리고개로 막히고, 동쪽 강릉 방향은 떡갈매기고개로 막혀 있다. 마을 주민은 54세대 128명이 전부다. 남한강 지류인 섬강의 지천들 중 하나가 성당 뒤 계곡에서 발원하고, 성당 근처 마을들의 옛 이름이 ‘느루개’(느릅나무), ‘떡갈매기’(떡갈나무), ‘밤골’, ‘거북바우’, ‘광대바우’, ‘고매딸기골’, ‘곧은골’이라는 사실이 이 땅의 성격을 보여준다.
멀리 주차장에서 보는 성당과 마을은 뒤쪽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와 하나다. 집들은 산비탈 그대로의 완만한 지형 위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마을 꼭대기에 터를 잡은 성당은 왼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산비탈이 이루는 윤곽선의 범위 안에 들어있다. 산비탈을 깊게 파 들어가지 않고, 산자락 끝을 다듬어 산의 흐름을 따라 앉았다. 성당 오른쪽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도 큰 산들 속 자연의 일부다. 그 산과 느티나무 사이가 성당의 자리다. 왼쪽 산자락과 오른쪽 느티나무 아래서 성당은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산자락을 따라 사선으로 난 언덕길을 걸어 성당으로 올라간다. 성당 옆 느티나무 잎들에 막 가을색이 들고 있다. 나뭇잎은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성당은 옅은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차분하다. 멀리서 본 성당은 도드라지지 않고 산자락과 함께 만만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가까이 서보니 우뚝하다.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솟았다. 장식 없이 소박한 외관에 규모도 크지 않은데, 평면이 좁고 높이가 높아서 곧은 힘이 느껴진다. 성당 앞에 서서 작아진 자기 체감으로 잠시 겸손해진다. 성당과 느티나무 사이에 서서 하늘을 본다. 성당보다 키가 큰 느티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퍼져 나간다. 하늘을 지향하는 성당과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 사이에서, 아득해진다. 가벼워지는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하다.
느티나무 아래서 성당 앞 마을을 살펴본다. 성당을 정점으로 넓은 둔각의 부채꼴을 이루고 있다. 궁핍하거나 쇠락한 기미가 없다. 집들은 기둥과 벽이 반듯하게 섰다. 벽에는 시멘트 마감 떨어진 데가 없다. 담장은 기울어진 데도, 허물어진 데도 없다. 마당과 앞길이 좁지만, 마당마다 길마다 꽃을 심었다. 마을길에는 농사용 비닐이 굴러다니지 않는다. 팽개친 자전거, 리어카, 농사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녹슬어가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소박하고 정갈하다. 빠짐없이 손길이 갔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데 정성을 들이고 있는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가족 3가구 40여 명이 용인에서 이곳으로 피해왔다. 좁고 척박한 땅에서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면서 살았다. 삶을 잇는 동안, 삶을 지탱해준 종교적 가치와 원칙을 조용히 스스로 지켰다. 종교적 삶을 이끌어줄 신부 없이, 세상으로부터 비켜서서, 80여 년을 서로 의지하며 그렇게 지냈다.
1886년 자유로운 믿음이 인정되었다. 세상의 박해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이 좁고 거친 땅을 떠나지 않았다. 1888년 처음으로 프랑스인 신부가 이곳에 부임했다. 초가집에 성당을 만들고,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았다. 1896년에 한국인 신부가 두 번째로 부임했다. 그는 1905년에 단단한 성당을 설계하고, 주민들이 벽돌을 구워 2년에 걸쳐 지금의 성당을 지었다. 부지 1,500평, 건평 120평, 내부는 90평이다. 백 년이 넘었고, 앞으로도 백 년 넘게 갈 것으로 보인다. 성당을 짓던 사람들도 오래갈 것을 소망했고, 그럴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농사와 생계일을 팽개치고 성당 건축 노역에만 전념했는데도 풍년이 들었다. 노역에 손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도 신바람이 났다.” 성당 건축에 참여한 당시 주민의 말이다. 이 말에 담긴 마음은 분명해 보인다. 새로운 삶을 건축하는 환희,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간절함, 환희와 풍요에 필요한 노고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의지다.
이 바램과 의지는 헛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마을은 딱 부러지게 자랑할 건 없다. 모두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사는, 하나 같이 착하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다. 법적인 문제도 없고, 농협 부채나 연체도 없는 부자 마을이다. 오랜 전통이 있는 풍수원성당에 연간 순례객이 1만 5천 명인데, 주민들은 마을길의 오래된 시멘트 포장을 산뜻한 아스콘 포장으로 바꾸기를 바라고 있다.” 2017년 마을 이장의 말이다. 이장은 ‘지난 100여 년 마을 사람들은 힘써 일했고, 합당한 풍요로움을 얻었으며, 흡족한 가운에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전하고 싶은 것 같다.
사제와 주민들이 성당과 당대의 생활만 지은 건 아니다. “저의 집에는 학동들이 21명 있는데,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그들을 부양할 필수품조차 없을 정도다.” 사제는 1908년 서울의 주교에게 편지를 보냈다. 배움과 미래를 중히 여겼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운영하던 삼위학당을 학교로 만들고 싶어했다. 학교는 1931년 4년제 성심학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 학교는 1946년 6년제 광동국민학교가 되었다가, 1972년에 천주교에서 횡성군 공립학교로 설립이 이관되었다. 1995년 폐교될 때까지 90여 년 동안 작은 산촌 공동체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자랐다. 남자 아이들은 커서 사제가 되고, 여자 아이들은 수녀가 되었다. 폐교 후, 성당과 마을은 2002년부터 횡성군과 공동으로 ‘유현문화관광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곳을 역사, 문화, 관광이 융합된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성당 마을과 6번 국도 사이에 있는 학교 교사는 지금 ‘유현문화관광지’ 순례자 쉼터와 문화해설사의 집으로 쓰인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뜻과 생활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도록 정성을 들이는 데 멈춤도 소홀함도 없어 보인다.
성당 뒤 좁은 계곡으로 난 길을 올라간다. 잠깐 걸어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시야가 열린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중심에 두고 비스듬한 산비얄 경사지에 넓은 터가 나타난다. 나무들이 제거된 땅은 남쪽을 향해 열렸다. 뒤편으로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동쪽 서쪽 북쪽을 모두 막아준다. 입구는 좁으나, 들어오니 넓고 아늑하다. 성당 앞 마을이 세상으로부터 비켜선 땅이라면, 이곳은 은둔의 땅이다.
험한 세상을 피해온 이주자들이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웠을 때, 그 삶의 자리가 여기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른쪽 경사지로 올라간다. 복원된 가마터와 원터 건물이 있다. 가마터 정자에서 계곡 건너편을 보니 경사가 더욱 완만하고 땅도 더욱 넓다. 경사지 아래 자리에 성당의 야외 강당이 있다. 위쪽 자리에는 낮게 석축을 쌓아 만든 작고 평평한 터들이 보인다. 화전민의 집터였는지, 새로 만든 캠핑 사이트인지, 화전민 집터에 만든 캠핑 사이트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계곡을 건너가 경사지 터를 둘러 도는 길을 따라 걷는다. 밤나무들과 잣나무들이 많다. 저절로 자라난 나무들로 보이지 않는다. 밤과 잣은 살아가는 데 요긴하다.
양지바른 곳을 골라 앉는다. 성당에서 잠깐 돌아 들어왔을 뿐인데, 바깥의 소리가 미치지 못한다. 오목한 땅에 맑은 정적과 고요가 고였다. 사람들이 화전밭을 매고 옹기를 굽는 모습이 떠오른다. 바깥 세상에서 자유로운 믿음이 가능해졌을 때, 사람들은 왜 이 땅을 떠나지 않은 것일까. 왜 수백 년을 갈 성당을 여기에 지은 것일까. 사람들은 정적과 고요 속에 화전밭을 매고, 가을빛 아래 옹기를 구웠을까. 정적과 고요로 밭을 매고, 순한 가을빛으로 옹기를 구웠을까.
정적과 고요 위로 가을빛이 쌓인다. 이슬비의 감촉이고, 비단 소리의 질감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부디 정적과 고요로 밭을 매고, 순한 가을빛으로 옹기를 구웠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카톨릭신문, 1981. 6. 28.
- 카톨릭신문, 1997. 8. 17.
- 횡성뉴스, 2017. 4. 10.
- 금경숙, “풍수원 본당의 학교운영 : 강원 산간 지역의 근대교육”, <학술지 교회사학 vol 16. 2019년 12월>
- 횡성문화원 홈페이지 (www.hs-cultur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