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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Oct 20. 2019

그와는, 잤어야 했다

그렇게라도 우리의 흔적을 남길 것을..

나는 그와는, 잤어야 했다.

내게 준 사랑과 고요와 평화

그 무엇에 대한 응답으로서가 아니라
깊은 존중과 따뜻함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어루만짐을 경험하는 일이
오직 그때밖에 없었음을
어쩌면 이 생에 단 한번
쉬어가라고 보내주신 사람에 대한 맞이로서, 하늘에 대한 예의로서, 운명에 대한 응답으로
그와는, 잤어야 했다

태초의 몸 그대로를 제물로 바치는 일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인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와는 잤어야 했다

힘이 들 때마다
살아가는, 살아내는 일이 힘들 때마다
숨을 쉬는 일 조차 버거울 때마다

가만 누워 눈을 감고
그 따뜻한 목소리와
물빛 머금은 다정한 눈빛과
뜨거운 간절함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온전하게 전해지던 그의 어루만짐을 떠올리며

-

에서
영혼의 휴식이라는 사치를 부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와 잤어야 했다
차라리 맨몸을 나누고 바닥의 마음까지 내보이면서
미련도 없이 헤어져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마침표 하나여야만 했다

강물같이 고요했던 그가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낯섦이 가득했던 제3의 지역
그 여름 장대비 속에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긴 이별의 입맞춤을 할 것이 아니라
건조한 호텔방에 밤꽃이 피어나게 해야 했다
가장 뜨겁고 가장 동물적이고 가장 꽃 같은 섹스를 해야 했었다
몸으로 나누는 사랑을 알 수 있는 단 한순간이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아무것도_마음조차_줄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라도 우리의 흔적을 남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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