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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Jun 26. 2021

1999

골목의 끝 집이었다. 집 뒤로는 오르막이어서  경사면을 뚝 끊어 생긴 높다란 벽 바로 옆에 있던 골목의 끝 집.


처음에 내가 둔 집은 월세 8만 원의 집이었다. 마당을 빙 둘러 세 방향이 모두 작은 방들로 된, 욕실과 화장실 역시 마당에 덩그러니 있었는데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고, 방문은 나무틀 사이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던 미닫이 문이었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 지방이어도 난방이 될 리는 없어 보였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생활을 위한 편의나 안전 같은 것은 볼 줄 몰랐고, 대학 근처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라는 사실만 중요했다. 그 집은 얼마 안 있어 철거되었다.


계약을 앞두고 엄마가 와서 보시곤 다시 집을 구했는데, 이번에는 2층 양옥집의 주인이 살고 있는 1층의 안쪽 방이었다. 학교에서 가까웠고, 특히 인문관까지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대문을 지나 벽을 따라 걸으면 건물의 외벽과  담 사이를 막아서 슬레이트 패널을 얹고 문을 달아서 안쪽 공간을 복도식 주방으로 쓸 수 있게 해 둔 집이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햇빛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 보았던 집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안전해 보였다. 월세 12만 원의 방이었다. 대문 옆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아랫쪽 공간을 막아서 만든 화장실 겸 욕실이 있었다.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는 곳에 있었고, 샤워를 하면 밖의 사람들에게 그 소리가 훤히 들리는 구조였다. 따뜻한 물은 저녁 7시 전후로만 나왔다.


좁은 골목길 건너에는 내가 살던 양옥과는 다르게 세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이 여러 개의 방으로 된 원룸 임대용 주택이 있었고, 동문 선배가 살고 있었다. 샤워 물소리가 들릴 수도 있었겠다는 사실은 지금에야 하는 생각이지 그때는 그런 것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어렸다. 2층은  나 같은 자취생들이 몇 살았고, 골목길도 내려다 보이고 트인 전망이었을 거다. 나는 그 계단을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주인 내외분은 좋은 분들이셨다. 어릴 적 외조부모님과 함께 살았기에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았다. 안채와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었는데, 안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와 냄새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언제나 배가 고픈 자취생이었기에 안집의 밥 냄새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에게도 작은 냉장고가 있었지만 반찬은 없었다. 주말마다 갔던 본가 한 시간 거리였지만 반찬을 싸서 자취방으로 가지고 간 기억이 없다. 천이백 원, 천오백 원 학교 식당에서 아침을 제외한 하루 두 끼  밥을 먹었다. 학교 식당 문을 열지 않거나 집에서 먹어야 하는 날에는 주로 죽을 끓여먹었다. 밥솥에 참치캔과 미역 자른 것을 넣고  사를 하면 그럭저럭 간이 되어 있는 죽이 되었던 것 같다.  앞에 오래 서 있을 것 없이 다른 일을 하서도 간단하게 끼니가 만들어졌다. 별다른 기능 없이 취사와 보온만 되는 빨간색 밥솥이었다.


여름, 창문 밖은 슬레이트 패널로 벽이 세워지고 위도 막혀 있는 구조라 햇빛도 들지 않았지만 바람도 들지 않았다. 부채 하나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게 된 주인 할아버지가 창고에서 골드스타 선풍기를 꺼내 주셨다. 선풍기를 하나 사지 그러냐 말씀은 하셨지만 아직 쓸만하다고 쓱쓱 다듬어 작동이 되게 해 주셨다. 름에는 더웠고, 겨울에는 추웠다. 매우.


그 방에서 잠을 잘 때, 유난히 가위에 많이 눌렸다. 집의 한쪽 구석에 있는 방이었고, 공기의 흐름이 막힌 곳이라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더운 여름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리면 자다가도 의식은 있고 몸은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되는데, 마음속으로 이 가위가 풀리면 주인집과 연결되어 있는 저 방문을 두드려서 도와달라고 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가위눌린 그 시간을 버텼다. 물론 그렇게 주인집과 연된 방문을 두드린 적은 없다. 가위에 깨면 다시 잠들기도 어렵고 겁이 나서 뛰쳐나와 집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밤을 새운다고는 했지만, 자리를 얻아서 눈을 감은 채 아침까지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한 번은 주인 할머니께서 도토리전 해 놓은 것을 맛 보여주셨는데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었던지 그 맛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자취방에 딱 한 번 과친구가 온 적이 있다. 한 번 와보고는 다음번에 수건을 몇 개 갖다 주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 한눈에 보였을 거다. 대학 소재지인 본가에서 통학하던 그 친구도 얼마 후 학교 후문 근처에 전망도 좋고 햇빛도 잘 들어오는 널따란 원룸을 구해 독립했다. 나도 그 친구 집에 한 번 가보았다. 우리는 각자의 자취방에서 매일 한 시간이 넘는 통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고,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자취방이 있었지만, 그러나 누군가들과 자취방에 함께 있지는 않았다. 방이 좁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한가롭게 보낼 시간이 없었다. 절대적인 한가로움도 없었고, 심리적인 한가로움도 없었다.



........


학 졸업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 시절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그립지 않았다. 근처에 일이 있어 한참만에 가 보았더니 내가 살던 그 집이 없어지고 원룸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골목의 끝 자리는 변하지 않았다. 학교 앞 자취방이 늘어져있던 주택가가 원룸 건물들로 꽉 차 있었다. 처음으로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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