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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Jul 03. 2021

1999(2)

저 길, 북문 근처 어디쯤이었다. 날 밤 저 내리막길에 주저앉아 나는 정신을 놓았고, 선배는 뺨을 몇 차례 때려 나를 깨웠다.

....

지하철 역에서부터 정문까지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젊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청년층은 물론이고 중고등학생들까지도 부담 없이 즐길만한 것들이 많았다. 비교적 저렴한 술집과 밥집들, 양한 눈요깃거리들과 노점상들, 중저가의 의류매장들. 지역의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그 지역의 대표 상권 중 하나였다.


반면에 캠퍼스의 가장 안쪽, 법대와 상대 건물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북문 쪽의 분위기는 정문의 그것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화려한 간판도 없었고, 복사 집들이 모여있었으며, 월식을 주로 하는 밥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끼에 삼, 사천 원이면 양은 쟁반에 밥과 국, 생선이나 불고기를 기본으로 김치, 나물류, 고소한 계란말이까지 그득 담겨 나오는 월식 집.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남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돌이켜보니 이천 년대 초반의 노량진의 분위기와 비슷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로 진학한 이들은 지역의 인재들이었고, 인근 중소도시에서 꽤나 성실했던 학생들이었다. IMF로 인해 재수도 못해보고 미련 없이 원서를 쓴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내 주변은 그러했다. 지방 국립대로 진학한 학생들에게 취업은 생존의 문제였고, 고시 준비는 재도약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었으므로 대학생활이란 곧 또 다른 입시 생활이기도 했다. 화려해본 적 없는, 화려할 수 없는 국립대생들이 올망졸망 오고 가던 북문.


저 내리막길 어디쯤에 주저앉아 나는 정신을 놓았고, 선배는 뺨을 몇 차례 때려 나를 깨웠다. 선배가 고마웠다. 선배는 급한 마음이었을 거다. 서늘한 가을밤 인적 드문 북문 내리막길에 주저앉아 울지도 못 하고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른 채 넋 놓은 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어린 여자 후배가 어떻게든 정신이 들도록 하여야 했을 것이다. 무리 중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조심스러워서 그러했을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고, 어둡기도 하고 다들 취기가 있어서 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지하에 있는 술집이었다. 술집 이리고는 해도 어딘가 세련되지 못하고, 어색한 공간이었다. 옛날 다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소파가 놓여 있고, 한쪽에는 음료수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찍힌 업소용 냉장고가 세워져 있었다. 실내는 무척 어둡고 쿰쿰했는데 그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은 바르게 줄 세워져 있었고 창백하게 밝은 조명이었다.


같은 지역 출신의 동문 동아리였다. 여고와 남고의 연합 동아리다. 동병상련의 처지로 고만고만한 청년들이 모여 타지에서의 외로움이나 고됨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도의 화려하지 않은 모임이었다. 특별히 잘 보일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알게 된 사이 이면서도 동향 출신이라는 것이 아주 오래된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주었다.


시험기간이 끝나 캠퍼스는 비었고,  기숙사생들과 자취생들만 학교에 남게 되었다. 북문 술집에 모여 앉았다. 인원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았다. 소보다 목소리들은 크지 않았는데 어딘가 산만한 느낌이었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누구의 험담이나 비밀연애에 관한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입영 통지서를 받았는데 자기는 아직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보지 못해 억울하다는 동기 남자아이의 이야기도 있었고, 법대 다니는 선배 언니의 친구가 임신을 해서 휴학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 선배가 회계사 시험을 몇 번 치다가 이젠 포기하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거나 아무리 취업이 어려워도 공무원 시험은 치기 싫다는 선배의 말도 있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내 귀를 지나갔는데 진짜의 무언가는 들려오지 않는 것 같았다. 오다가 막히고, 막히고, 겉도는 무언가가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는 눈썹이 크게 한 번 올라갔다가 내려오거나, 손으로 입을 막거나, 주변을 살피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멈춰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고 그런, 누군가들의 비밀 이야기쯤이겠거니 했다. 그날,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다.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내고 싶어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일이 일어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비밀로 하고 싶다면 그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사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계단을 올라와 거대한 무언가에 눌리는 듯한 공기로부터 빠져나왔다. 술은 얼마 마시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인사를 나누고 기숙사로, 자취방으로 흩어졌다. 가장 취기가 없는 사람들 몇몇이 서늘한 새벽 조용해진 골목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선배에게 말했다. 오늘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평소와 다르다고. 배가 머뭇하는 사이 법대를 다니던 언니가 말했다.

 

그 소식, 듣지 못했냐고.


그렇게 나는 흘러내리듯이 주저앉아버렸다. 가을이었다. 그 아이가 가버고 했다. 나는 잠시 정신을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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