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묵
초록 논바닥,
봄부터 가을까지
바위처럼 있던 백로 하나
말없이 자리를 비운다
그 빈자리에
북쪽에서 날아온
기러기 떼가 내려앉아
얼어붙은 빈 들녘을 채운다
내어준 쪽엔
분노가 없고
차지한 쪽엔
우쭐함도 없다
땅의 주인은
너도 나도 아님을
백로와 기러기는
서로 묻지 않는다
그 들녘을 지나는 나는
쥔 손을 펴지 못하고
빼앗기면 잠들지 못하는 생이라
그들의 암묵에서 멀리 있다
어차피
어디론가 묻혀 갈 인생,
나는 그들의
암묵의 거래가 부럽다
자리를 내어준 백로는
건너편 냇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안개를 벗 삼아
다시, 아무 말 없는 바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