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것이. 전기밥솥이군요.

열악한 주방환경에서 만드는 요리

by 프렌치장금이



남편의 프랑스 대학원 입학시기와 나의 휴직시기가 다른 이유로 남편이 4개월 먼저 프랑스에 가서 집을 구하고 살림을 차려놓았다. 4개월 간 통화 할 때마다 나는 늘 뭘 먹었는지 궁금해했다. 요리를 아예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식재료도 다를 테고 혼자서 세끼를 챙겨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닌 걸 알았기에 걱정했다. 물어볼 때마다 남편은 밥도 해 먹고, 볼로네제 파스타도 만들어 먹고, 가끔 스테이크도 구워 먹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래, 아마존 정글로 가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낯설긴 하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따뜻한 흰쌀밥은 먹고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마음에 한국에서 쓰던 밥솥을 가져갈까 물어봤지만 이미 다 있다며 그저 옷가지만 챙겨 오라고 했다. 자신만만하길래 무슨 밥솥인가 물어보니 아마존에서 20유로(한화 약 3만 4천 원) 주고 샀다고 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4개월 뒤 나는 말린 미역, 황태, 각종 소스를 바리바리 챙겨서 프랑스에 도착했다. 첫날은 관광객 모드로 노느라 외식을 했다. 베트남 음식, 양고기 스테이크, 집 앞 빵집 등 4개월 동안 혼자 가던 식당에 이제는 같이 가서 음식을 먹었다.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혼자여서 심심했을 텐데 씩씩하게 지냈구나.


미식의 도시 파리에 살면서도 분명 한식이 그리웠을 것 같아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나섰다. 천천히 둘러보니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냄비, 프라이팬, 간장, 쌀 등등.. 심지어 식초도 있었다. 싱크대는 작지만 뜨거운 물이 콸콸 잘 나오고, 인덕션은 왜인지 조금 끈적거렸지만 잘 작동되었다.


조리대 옆으로는 정사각형 큰 통창이 있다. 첫날에는 어두워서 잘 못 봤지만 새벽녘 동틀 때 보니 옆 집 발코니 정원과 이어져 있었다. 겨울이라 아직은 앙상한 나무들이 어스름이 보였다. 무슨 식물인지 모르겠지만 추운 날씨에도 푸른빛을 뽐내는 난초 같은 것들이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봄이 되면 어떤 꽃이 필까. 앞으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주방과의 첫 만남이었다.


파리에서의 첫 메뉴는 미역국. 부모님 생신마다 끓여서 살면서 가장 많이 끓여 본 음식이었다.


자신 있게 미역과 황태를 들기름에 볶고, 물을 부어 국간장으로 간을 맞췄다. 이제 푹 끓이기만 하면 완성되는 아주 간단한 레시피다. 국이 끓여질 동안 밥을 지어야지 하고 전기밥솥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좁은 주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전기밥솥'처럼 생긴 건 없었다. 전기가 통하는 조리기구는 멀티쿠커처럼 생긴 끈적거리는 무언가 뿐이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가.


아마존에서 온 3만 4천 원짜리 전기밥솥이 너구나.


성능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행주로 닦았다. 어쩌다 이렇게 끈적거리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전기밥솥이라 불리는 것의 생김새는 라면 끓일 때 사용하는 멀티쿠커와 똑같이 생겼다. 전혀 밥솥으로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냄비뚜껑처럼 생긴 뚜껑이 전부인데 어떻게 밥이 지어지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밥은 먹어야 하니 얼른 쌀을 씻고 'COOK'버튼을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기가 나간 건가? 왜 안 들어오지? 한참을 씨름하다가 숨겨져 있는 주전원 스위치를 발견했다. 이 전기밥솥.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 사이 국은 다 끓여졌고 밥이 완성되기를 앉아서 기다렸다.


어제는 외식을 해서 몰랐지만 막상 이 부엌에서 요리를 해보니 도대체 4개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국그릇도 없고 밥그릇도 없었다. 그냥 프라이팬과 냄비채로 먹으며 끼니를 때운 것이다. 그릇이 아예 없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한국에서 통화할 때는 '귀찮아서 덜어먹지 않는 건가'생각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주걱과 국자도 없는 것을 보고 왜 이렇게 주방이 끈적한지 따져 묻지 않았다. 4개월을 참 씩씩하게 지냈구나.



처음만 힘들지.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모든 게 편하고 안정적이었다. 살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더듬더듬 영상을 찾아가며 요리를 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곳은 늘 먹던 미역국도, 흰쌀밥도 어렵게 느껴진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타지생활은 먹고 움직이는 모든 게 도전이 되는구나. 내 삶의 난이도가 급 상승했다.


나는 이제 막 출발점에 서있는 거다. 여태까지 쉬운 삶을 살아온 것이고, 앞으로 내게 다가 올 날들은 마냥 친절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 끈적거리는 주방도, 보온기능이 시원치 않아서 매 끼니마다 밥을 새로 해야 하는 전기밥솥도 나와 함께 가야 할 친구들이었다. 멱살 잡고 끌고 가야 했다. 그것이 주부의 역할이라고 초보주부는 어두운 부엌에서 생각했다.


한국보다 열악하고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내가 차리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으려 한다. 맛있지는 않더라도 정성스럽게 차린 한 끼가 하루에 어떤 에너지를 주는지 그 힘을 믿는다.



어렵게 만든 미역국을 뜨끈하게 먹고 시작하는 하루는 개운하고 설레었다. 깜깜한 모습만 봤던 통창에는 햇살이 가득 쏟아졌다. 빈틈없이 가득하게 햇살을 담은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주방청소하는 방법을 검색하고, 뜨거운 물을 받아 주방세제를 풀어 끈적한 주방을 싹 닦았다. 아까 새벽의 어두운 부엌과는 다른 향기가 났다.


이제 이 주방은 달라질 거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식재료들이 새로운 요리로 탄생하는 보송보송한 공간이 될 거다. 일을 하던 한국 생활보다 살림을 하는 프랑스가 더 바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오히려 기쁘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니 기꺼이 피곤해지겠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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