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완연한 봄이 왔습니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남동으로 향했습니다. 뚝섬을 지나면서 지하철 밖을 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뚝섬 유원지에서 돗자리를 펴고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고 있더라구요.
잠시 후,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연남동 방향 출구로 나왔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연트럴파크에 삼삼오오 모여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렇게 햇살 좋은 이곳에서는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겨우내 꽁꽁 숨어있던 맥주들이 봄기운에 깨어난 듯, 연남동 초록 공원을 여기저기 누비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겨울잠에서 깬 맥주 개구리 같습니다. 연남동에는 크래프트맥주 바틀샵이 많습니다. 냉장고서 차갑게 잠들고 있는 수 많은 개구리 중에 가장 먹음직스러운 한 마리를 골라 손에 쥐어 들고 연남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마시는 ‘길맥’ 문화가 자리잡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맥주 종류 중에서 어떤 맥주가 맛있고 좋은 맥주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연남동까지 나들이를 나왔는데 흔히 마실 수 있는 편의점 4캔에 만원짜리 수입맥주를 사기는 좀 그렇고… 남들처럼 빠삭한 맥주 지식을 뽐내며 당당하게 탐스러운 맥주를 고르고 싶은데, 어쩜 이리도 맥주가 많은지, 쉽게 고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마시는 2~3천원짜리 맥주보다 이 곳 맥주는 평균적으로 한 병에 5천원~8천원 정도로 꽤나 비싼 몸 값을 가진 녀석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 골랐다가 내 입맛에 맞지 않다면 저녁 메뉴의 퀄리티가 달라질 수 있을 만큼 부담되는 가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맥주를 골라야 실패없이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그 기준에 대한 색다른 방법을 제안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맥주의 기준은 3가지 입니다. 그리고 이 3가지 기준의 전제는 ‘나 자신이 맥주를 어떤 용도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술, 음식, 액세서리
저는 사람들이 맥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나눠서 ‘술, 음식, 액세서리’로 바라본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맥주는 누군가한테는 음식이고, 어떤 이에게는 취하기 위한 알코올이며, 또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맥주에 대한 시선을 크게 구분해서 자신에게 맥주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가격이나 상황에 맞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기게 됩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맥주는 음식이다.
맥주를 음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우선 맥주의 주 원료인 보리맥아는 상당히 영양가 높은 식재료이며, 맥주는 액체화 된 빵이라고 봐도 전혀 무방합니다. 맥주 자체가 훌륭한 탄수화물 공급원이 될 수 있죠. 그래서 맥주 문화가 발달된 유럽인들은 맥주를 쌀이나 빵 대신 먹는 식문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독일이나 체코와 같이 맥주 소비가 큰 나라들의 음식을 보면 대체로 굉장히 짭니다. 그들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요리 하나와 꼭 맥주를 같이 시켜서 먹습니다. 그들에게 맥주는 탄수화물로 된 밥이고, 요리는 반찬인 것입니다.
그래서 밥에 대한 개념이 확실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여행을 하면, 음식이 굉장히 짜다는 것에 놀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맥주 없이 요리만 먹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식당에서 밥 없이 반찬만 먹는 희한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도 맥주를 음식으로서 먹게 되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기준이 굉장히 명확해 집니다.
공원이나 유원지로 나들이 소풍을 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도시락을 선택하는 기준.
특별한 날 근사한 저녁 식사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때 음식의 선택 기준.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것에 기준
추운 겨울 밖에 나가기 싫어 혼자 적당히 끼니를 때울 때의 기준 등등
저를 포함해 여러분들도 위와 같이 식사를 하는 다양한 상황이 있을 겁니다. 비록 음식을 먹는 행위는 같을 지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서 선택하는 음식의 종류도 달라지죠. 마찬가지로 맥주를 음식으로 바라보면 상황에 맞는 다양한 선택의 기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상쾌한 주말나들이나 연남동 공원 같은 곳으로 소풍을 하는 상황이라면, 브런치나 도시락을 닮은 맥주가 좋겠죠? 가격은 샌드위치 정도의 가격대이면 적당할 것이고, 맛도 쓰지 않고 적당히 향도 좋으면서 마시기 편한 맥주가 어울리겠죠. 그렇다면 사과로 만든 발효주 ‘씨드르’혹은 ‘사이더’(발음에 따라 다르나, 사과 샴페인이나 사과 맥주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그리고 상쾌한 홉의 향이 나면서 도수와 쓴맛이 강하지 않은 종류의 페일에일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경치 좋은 산 정상이나 요즘 핫한 남해의 금산산장 같이 풍경이 최고의 안주인 곳에서는 어떤 맥주를 먹어도 꿀맛이겠지만 이런 경치를 보면서 맛 좋은 크래프트맥주를 먹을 수 있다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최고의 음식일 겁니다.
특별한 날 근사한 저녁 식사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때는, 조금은 비싼 가격대의 특별한 맥주도 좋겠죠. 그런 상황에서 잘 어울리는 좋은 맥주로는 람빅, 레드사워에일 같은 와인의 풍미를 갖춘 럭셔리하면서도 이색적인 맥주도 좋겠죠.
스트레스 확 풀고 싶을 땐, 매운맛이 유난히 당기듯이. 그런 날에는 입안이 얼얼 할 정도의 쓴맛이 도는 임페리얼 스타우트나, 더블 IPA가 그 날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에 좋겠죠. 혹은 얼음처럼 차갑고 짜릿할 정도로 탄산감이 강한 필스너 맥주 한 모금은 밉상 김부장의 그 몇 가닥 안 남은 머리털을 모조리 쥐어뜯는 것 같은 짜릿한 쾌감을 맛 볼 수 있죠.
추운 겨울 밖에 나가기 싫어 혼자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싶을 때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튼실한 군고구마 하나면 뱃속이 든든 하듯이, 바나나향 물씬 풍기는 바이젠 스타일이 뱃속부터 따듯하고 든든하게 채워 줄 최고의 맥주일 것입니다.
이렇게 맥주를 음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현재 상황에 적절한 자신에게 좋은 맥주를 선택하는 명확한 기준이 생길 것입니다.
맥주는 그냥 술이다.
네 맞습니다. 맥주는 술입니다. 술의 용도는 1차원적으로 취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1차원적인 목적으로서 맥주는 정말 가성비가 좋지 않은 술입니다.
소주에 비해서 알코올 도수가 약 1/3 이상 낮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소주의 두배 가까이 합니다. 맥주를 ‘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맥주 말고 소주를 드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분들에게 최고의 맥주를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저는 발포주 필OO트나 소맥 용도의 맥주가 최고의 맥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취하려고 마시는 술에는 이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필OO트나 소맥 용도로 흔히 마시는 맥주도 상황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맥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로 좋은 맥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를들어서 클럽과 같은 공간에서는 맥주는 아마 그냥 알코올일 확률이 높습니다. 클럽에서는 맥주의 맛이나 향 보다는 취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용이 훨씬 많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 공간과 상황에서는 싸고 양많고 알콜도수 높은 맥주가 최고의 맥주가 아닐까요? ㅎㅎㅎㅎㅎ
맥주는 액세서리다
맥주를 액세서리로서 대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만든맥주의 특성을 나타내고자 맥주 병의 레이블 디자인에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최근에 나오는 수제맥주의 병 디자인이 굉장히 예뻐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맛과 스타일은 잘 모르지만 디자인이 예뻐서 선택하고 길맥을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아진 것 같습니다. 맥주의 디자인을 일종의 자신을 표현하는 액세서리 용도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맥주만큼 좋은 아이템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조건 자신이 좋아하는 디자인의 맥주가 최고의 맥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맥주를 선택하고 마셔보면서 디자인과 맛이 모두 만족스러운 맥주를 찾는 다면 그 또한 그런 분들에게는 최고의 맥주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좋은 맥주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의 입맛과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맥주가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는 맛있고 훌륭한 맥주가 다른 이에게는 그저 그런 맥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좋고 나쁜 맥주를 고를 수 있는 기준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는 수 많은 맥주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이 없으면 사랑스러운 맥주를 싫어하게 되거나 주구장창 비슷한 맥주만 마시는 과오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시한 세가지 기준으로 맥주를 대한다면 자신의 상황과 취향에 따른 최고의 맥주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여러분이 맥주를 음식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맥주 마시기 좋은 날이 됐습니다. 올봄 여러분에게 맞는 최고의 맥주 하나 찾아 보시는 건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