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젤리제에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어요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여기까지만 들어도 프랑스 샹송의 음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Aux Champs-Élysées
Aux Champs-Élysées
Au soleil, sous la pluie
À midi ou à minuit
Il y a tout c'que vous voulez
Aux Champs-Élysées
샹젤리제에는,
샹젤리제에는,
해가 뜰 때 도,
비가 올 때 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어요.
샹젤리제에는.
https://youtu.be/1JhYYUWOBBs?si=HW1CyvpLA1daR7do
그렇다. 샹젤리에는 쇼핑으로 유명한 거리다. 우리가 아는 프랑스 브랜드들, 프랑스 브랜드가 아닌 유명한 다른 나라 브랜드들까지 이곳에 다 있다. 여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샹젤리제 거리.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살 까 말까, 들었다 놨다 한참을 망설이는 일이 없다. 돈이 충분히 있어서? 땡, 그래봤자 월급쟁이가 다 똑같지 않겠나.
나는 새 상품 쇼핑을 싫어한다. 나는 단순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며, 한 번 고르면 그것만 사용하는 사람이라 쇼핑을 하고, 새로운 것을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멘붕이 오는 시점은 이케아와 같은 곳에 갔을 때이다. 물품이 너무 많고, 뭘 골라야 할지 모를 때의 스트레스는 갖고 싶은 것이 있는 데, 돈이 없어 못 사는 것만큼 크다.
내가 입는 옷들은 주로, 누가 안 맞아서 주는 경우, 입던 옷에 구멍이 나서 산 옷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세상에 구멍 나는 옷이 있냐 하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 옷에 꽂히면 구멍 날 때까지 입고, 동일한 브랜드의 동일한 모델을 다시 산다. 내 옷장에는 그래서 5-10년 된 옷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샹젤리제는 나에게 쇼핑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샹젤리제에 온 목적은 샹젤리제 극장 (떼아트르 드 샹젤리제/ Théâtre des Champs-Élysées)에 가기 위함이다. 내가 파리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이자, 아름다운 내부 장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아르데코( Art Deco) 스타일로 지어진 이 극장은 1913년에 지어졌다. 지난 시간에는 아르누보에 대해 배웠는데, 오늘도 그냥 넘어가기엔 거시기하니 아주 짧게 아르데코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은 모름지기 매일매일 배워야 한다. 뒤로 가기 누르려는 분들, 잠깐만 아르데코라도 읽고 가시라. 딱 세 줄로 요약해 드리겠다.
https://brunch.co.kr/@gochujangwaffle/280
아르누보가 곡선과 자연에 영감을 얻은 예술이라면, 아르데코는 직선과 모던함, 깔끔함에 영감을 얻었고, 아르누보보다 조금 더 뒤에 시작되었다. 자, 벌써 한 문장 썼고, 이 문장까지 하면 단 한 문장 남았는데 나머지는 이 한 문장으로 끝내겠다. 현대적임과 모던함을 추구했고 우리가 아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아르데코 스타일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오늘 이곳에서 2005년 쇼팽콩쿠르 1등을 차지한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Rafał Blechacz의 피아노 독주회를 감상하러 왔다. 폴란드의 조성진이라 생각하면 된다. 클래식, 재즈, 컨템퍼러리 음악, 모던 댄스를 망라하는 여러 공연을 시연하니, 관심 있는 분 들은 아래의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https://www.theatrechampselysees.fr/en/home
사실, 정말로 고가의 명품들은 샹젤리제 거리가 아닌, 몽테뉴 거리(Avenue Montaigne)에 있다. 샹젤리제의 뒤편이다. 구글맵에 샹젤리제극장을 찍고 찾아가는데, 이 거리에 있어 본의 아니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온갖 가게들을 다 구경했다. 물론 밖에서만.
가다가 엄청나게 파리스러운 한 건물과 빨간색 천막과 빨간 제라늄꽃으로 장식된 어느 호텔을 지났다. 자세히 보니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이다. 한참을 벨루치언니와 메뉴를 들여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Se mangiamo qui, dobbimao chiedere solo l'acqua, senza vino, solo l'aqua di rubinetto. haha.
우리가 여기서 먹으려면 와인은 시키지 말고 물만 시켜야겠네. 물도 수돗물 달라고 해야겠다.
Ma possiamo mangiare qui, non è che non possiamo pagare. Nessun problema. Possiamo pagare, solo che poi dovremo mangiare solo pane per tutto il resto del mese, fino al prossimo stipendio.
우리 여기서 먹을 수는 있지.. 돈을 못 내서 안 먹는 것 아니잖아. 낼 수 있고 말고. 다만, 여기서 밥 먹으면 다음 달 월급날까지 한 달간 집에서 빵만 먹어야겠다.
쓱 테라스 쪽을 살펴보니 재력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날이 무더운데 간간히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손님들 덥지 말라고 미세한 물방을 들을 분사했다. 음, 역시 마케팅과 상술에 능한 나라답군이라 생각하며 표를 사러 극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뭐, 스프링클러는 우리 할아버지 밭에 가도 있다.
공연은 8시, 인터넷에서 미리 사려 했는데 귀찮아 그냥 티켓오피스에서 구매하려 도착하니 6시 55분이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사람들이 의외로 부지런하네? 한 시간도 넘었는데, 미리 와 있다니.'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다들 대리석 계단 바닥에 앉아있었다. 너무 더워서 시원하려고 그러나 생각하며, 티켓오피스에 가서 가장 저렴한 30유로 (5만 원가량) 짜리 티켓을 구매했다. 벨루치언니가 선물도 많이 사 오고, 아이스크림도 사 주고 해서 내가 언니티켓도 선물하기로 했다.
주문을 하고 카드를 내미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느 파리지엔이 우리에게 급하게 말을 했다.
"If you wait another 5 minutes, it costs only 5 euros."
"5분만 기다리면 티켓 한 장당 5유로예요."
머시라? 이제야, 이해가 갔다. 티켓이 매진되지 않으면 공연시작 1시간 전부터 티켓을 5유로에 판매해서 다들 저렇게 바닥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친절한 파리지엔 아저씨, 좀 이따 보면 와인이라도 한잔 사드려야겠네(그 말을 하시고 난 뒤 사라져서 와인으로 은혜값기 실패).라고 생각하며 티켓창구에 티켓 취소를 요청했다. 정말 골든타임, 카드 비밀번호를 누르기 5초 전에 친절한 파리지엔의 도움으로 무려 폴란드 조성진의 피아노 콘서트를 5유로(8000원)에 보게 되었다.
혹시라도 나처럼 샹젤리제에 공연을 보러 가시는 분들, 참고하시면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 단, 5유로 자리는 가까운 자리가 아니라 먼 좌석이다.
들어가서 열심히 가장 뒷 좌석, 안 보이는 좌석을 찾고 있는데 직원이 어차피 매진 안 되었으니까 저기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가라고 한다. 오늘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운이 째지는지 나도 모르겠다. 일단 즐기자. 앉으니, 내부가 너무 멋지고, 천장이 너무 아릅답다.
https://youtu.be/vSoiVyexG_Q?si=l--MAKZ35pBBgO0B
콘서트 도중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Rafał Blechacz의 유튜브 영상으로 대신한다.
콘서트는 너무 멋졌고, 벨루치언니도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워 들으면서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파리지엔이 싸가지 없다 누가 그랬나. 다른 월급노동자의 궁한 주머니 사정까지 생각해 주는 친절한 파리지엔 아저씨에게 감동했다. 우리는 이렇게 둘이 합쳐 10유로 (만오천 원)로 천국에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