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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추장와플 May 12. 2024

눈알 빠지게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

거지도 3개 국어를 하는 플랜더스

벨기에 개론 1편에서 설명했듯, 벨기에는 공용어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렇게 세 개다. 내가 사는 앤트워프는 벨기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네덜란드어를 사용한다. 세계 3대 패션스쿨 앤트워프 왕립패션스쿨이 있는 그곳이다. 벨기에의 패션과, 경제, 문화를 쥐락펴락 하는 이 도시는 영어가 곧 잘 통한다. 주민들 대부분이 영어를 할 수 있다. 즉, 네덜란드어를 못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은 없다.


플랜더스(네덜란드어 사용지역)에선 웬만하면 거지도 3개 국어를 한다. 슈퍼마켓 캐셔 아주머니들도 웬만하면 3-4개 국어는 한다. 그러니 굳이 네덜란드어를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당신의 방문이 단기인 경우에 한해서만!


다음을 전제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했다.

1. 나는 이혼을 해서 벨기에 땅을 떠나지 않는 이상은 이곳에 살아야 한다.

2. 나는 가정주부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3. 자식이 생기면 유치원과 학교에서 쓰는 언어는 네덜란드어이다. 숙제도 당연히 네덜란드어이다.  

4. 사람일은 모른다고 남편이 혹시라도 아주 일찍 삼도천을 건널  경우, 내가 먹고살아야 한다.


내가 돈을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영어를 써도 무방하지만, 이곳에 긴 시간 거주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위와 같은 전제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네덜란드어를 하루빨리 배우는 것이 가장 현명하리라는 결론을 지었다.

이민자가 워낙 많은 나라였기에 "네덜란드어를 정부지원하에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라고 들었지만....


역시 공짜의 힘은 강력했다. 반년동안 모든 수업이 꽉 차 있었고, 기약 없이 계속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정부지원 무료수업은 너무나도 진도가 더뎠다. 중급이상까지 수강하려면 3년이 걸렸다. 나는 빨리빨리의 한국인이었다. 3년간 일도 하지 말고 그냥 신세 좋게 언어만 배우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다른 방편을 찾기 시작했다. 앤트워프 대학 부설의 네덜란드어는 정부지원이 되지 않지만 1년 내에 전 과정을 끝내면 네덜란드어로 대학수업을 수강할 수 있는 실력까지 된다고 했다.


그런데 가격이 문제였다. 무료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1 레벨 당 9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총 5 레벨이 있는데 모든 레벨을 마치려면 450만 원이 필요했다.

일단 다른 레벨을 생각하지 말고 시작부터 하자. 일단 레벨 1을 등록했다.


차후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프랑스어 수업도 다녀봤지만, 나의 결론은 "무엇인가 얻으려면 적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였다. 비싼 돈을 냈으니, 공부하기 싫어도 꾸역꾸역 나가야 했다. 싼 것이 비지떡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대가에 따른 마음가짐의 차이는 부정할 수 없다.


네덜란드말을 과연 이런 돈을 내고 배울 정도로 쓸모가 있는가? 솔직히 쓸모 있는 말은 아니다. 스페인어처럼 남미의 반 이상이 쓰는 언어도 아니고, 프랑스어처럼 아프리카의 대다수 지역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다. 한마디로 쓸데없다.

그럼 배우기 쉬운 언어인가? 쓸데도 없는데 어렵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살아야 하니 이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한국어는 세계적으로 매우 많이 사용되는 언어인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외국인이 한국에서 10년 이상 살았는데 한국어를 몇 마디 못한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왜 한국에서 사는데 이것밖에 말을 못 하지라고  생각 할 것이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출석한 대학부설 언어원 수업 첫날. 선생님이 들어왔다. 다짜고짜 첫날부터 그냥 네덜란드어로 수업을 하신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현타가 왔다.

1단계라고 했는데 그냥 바로 네덜란드어로 하네?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살펴봤다. 다들 벙찐 얼굴이다. 다른 수업에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 듯하다.


수업 중간 휴식시간에 다른 친구들과 영어로 조금씩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바로 지적하시며, 되던 안되던 무조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라고 했다. 급 조용 해지는 교실... 숙제는 또 어찌나 많던지. 말을 못 알아들어 숙제인지도 몰랐건만 네덜란드어 지식이 조금 있는 친구가 영어로 몰래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고3 수험생이 영어시험 준비하듯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 화장실, 거실, 부엌 사방팔방에 네덜란드어 단어를 눈이 가는 곳마다 번역해서 붙여놓았다. 가기 싫었지만 비싼 돈을 내고 땡땡이를 칠 수는 없으니,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가서 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선생님이 하는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20-30프로 밖에 안 들린다. 그래도 대충 뭐에 대해서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이 절반정도 들리기 시작했을 때, 슈퍼나 카페에 가서 네덜란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배우는 네덜란드어는 존재하지 않는 네덜란드어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다음화에서 계속.






이전 03화 아랍이 아니고 벨기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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