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새벽 5시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와서, 입원의 사전 절차로 코로나 PCR 검사 후 음성 판정을 받고 일반 병실로 옮긴지도 나흘이 지났다. 비록, MRI 검사는 실패했으나 폐 CT와 X-ray 촬영으로 드러난 현재의 몸상태로는 당장 큰 병원으로의 이송(移送)이 불가피하다는 점이었다. 염증이 양쪽 폐로 활성화되는 중이고, 폐 염증의 또 다른 원인으로 간농양(肝膿瘍)에 대한 예진(豫診)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담당의사의 말을 빌자면, 지금 당장 큰 병원으로 옮겨 폐렴을 집중 치료하는 가운데 염증의 원인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이 앞으로 빈번해 질지도 모르는 폐렴의 후환(後患)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 한다. 달리 취해 볼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위중증 환자에게 대놓고 말하는 축객령에 다름없었지만, 이를 전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는 담담 의사로서의 애틋함과 나의 처지를 위로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그득 담겨 있었다.
이날 아침, 옆 병상의 박 선생님은 퇴원 준비로 마음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열 하루 째, 그동안 식사할 때마다 자리를 피하곤 했던 박 선생님이 금식이 해제된 엊저녁부터는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게걸스러울 만큼 잔반(殘飯)조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우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물린 지 한 시간 여가 이미 지났고, 그 새 퇴원 수속을 하느라 원무과를 오르내려서였는지 표정은 밝지만 숨은 가빠 보였다. 한 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었다 한들 배곯아 가며 열흘을 넘긴 몸상태가 어찌 평소의 몸상태와 같을 수 있을 것인가.
담당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자 각자의 병상에서 아침 식후의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이웃 환자들의 눈길이 곧장 내게로 쏠렸다. 퇴원이 빈번한 금요일이니, 아마 나도 담당의사로부터 퇴원 일자를 통보받고 왔을 거라 대충 짐작하는 눈치들이었다. 이미 간호사가 와서 관물대(官物臺)의 소지품마저 정리를 해 둔 터라, 그들의 섣부른 짐작 속으로 달리 의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속마음을 남에게 드러내 놓고 감출 수 있을 만큼 포커페이스는 아니다. 금세 어두워진 표정을 읽었는지, 박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다른 큰 병원으로 옮기는교?"
아마, 며칠 사이를 두고 심상치 않게 깊어지는 내 기침소리를 두고 걱정해서 하는 말일 거다.
"예, 그래야만 한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해봐도 대답을 하는 목소리의 잔떨림이 심해진다. 마치 쓰나미처럼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온몸으로 확 덮쳐 온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가 마뜩했던지 노익장과 청년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병상을 벗어나서 병실 밖으로 제각각 몸을 감추었다.
둘만 남았으니, 지금껏 둘 사이에 아껴두었던 말을 이제는 해야겠다.
"박 선생님, 족보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정확한 내용을 알아두었으면 해서요. 집안 어르신들이 불시에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제 족보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들이 우리 집안에 거의 남아 있질 않거든요. 앞으로 의미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조상님의 몇 세 손인지 정도는 그래도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정제 공파 37 세손이자 사문진파 24 세손.' 대동보(大同譜)에서 중시조(中始祖)로 갈려 나온 문파(門派)까지 동일하니 인연도 보통 인연은 아니다. 항렬(行列)은 나보다 두어 걸음 앞서나 선뜻 형님이라는 호칭(呼稱)으로 부르기에는 아직은 낯이 설고 낯간지럽기까지 하다. 서로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두고, 다음에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날 것을 기약(期約)하며 며칠간의 짧고 귀한 인연을 뒤로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119에 실려 영남대 의대로 이송되면서까지 줄곳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말이다.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는 불가(佛家)에서 전해져 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속 방점(傍點)이 회자정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자필반 쪽에 찍혀 있음을 자인(自認)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건강한 몸으로 되살아나 돌아오리라!' 그만큼 삶에 대한 욕망이 절실해졌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때가 바로 이 시점이었다. 실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평소 낯익은 풍광들마저 메마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아무리 애를 써봐도 더 이상 눈의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이런 볼품없는 모습으로 포항을 떠나나 아직은 다시 돌아올 날에 대한 기약은 없다. 하지만,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는 거자필반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마치 주문처럼 각오로 삼을 때, 얼핏 낯선 촉감이 있어 옆을 바라보니 119에 동승한 막내가 양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넉넉하게 편 두 손으로 슬그머니 훔쳐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