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잃어버린 날

5화. 낯선 온기

by 글쟁이



정하윤의 이야기


“아, 이 아이는 이제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그 순간, 나는 무너졌다.

눈을 감고 싶었다. 아니, 그냥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아이의 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희는 나를 지나쳤고,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그 평온한 눈빛에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기억’ 속 사람이 아니란 걸, 한순간에 직감했다.


의사 선생님은 그가 깨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그 말이 아무리 따뜻하게 들려도,

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져 내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쉽게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이 평균 이상이었다.

운동도, 성적도, 외모도.

무엇 하나 눈에 띄는 허점은 없었고,

어느 무리에 있어도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런 재희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소꿉친구라는 이름으로.


같은 반이 아니어도, 같은 동네라는 이유로

우리는 늘 함께였고, 나는 언제부턴가 그 아이의 곁이 익숙해졌다.

그 애가 웃으면 나도 웃었고,

그 애가 다치면 내가 더 아팠다.

그 애가 기뻐하면 나도 기뻤고,

그 애가 슬프면 나도 울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으니까.

그 어떤 감정도,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재희와 함께하는 시간만이 내겐 전부였으니까.



병실의 조명은 차가웠다.

창밖의 오후 햇살이 벽에 눕는 그 순간에도

이 공간만은 계절과 무관하게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나 자신을 느끼는 것조차,

이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조용히 그의 침대 곁에 앉아

살짝 구겨진 이불 끝자락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너 또 이마에 흉질라… 얼마나 세게 넘어진 거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감정은

내가 바랐던 위로와 다르게 흘러내렸다.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엔 내가 없었고, 그 안에 담긴 ‘나’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미소, 그 따뜻함이

언제부터인가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기억을 잃었을 뿐, 감정은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이 아이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말을 걸고, 손을 잡고, 숨을 맞춰 앉아 있는 이 시간들이

언젠가 다시 우리를 ‘우리’로 되돌려 줄 거라는

아주 희박한 믿음 하나로.

그리고 그 믿음이,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그가 나를 기억할까 봐서가 아니다.

그저, 그가 다시 내 곁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그 소망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재희야.

넌 날 몰라도…

나는 아직도 너야.”

비록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그 아이가 여전히 내 옆에 있다고 믿고 싶다.

그 믿음만으로,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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