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 정철이 정의한 '부부'가 생각을 붙잡는다. '부부'를 한 글자로 표현하면 '짝', 두 글자로는 '하나', 세 글자로는 '나란히', 네 글자는 '평생 친구', 다섯 글자는 '사랑합니다' , 열아홉 글자로는 '당신이 그랬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라고 한다.
짝, 하나, 나란히, 평생 친구, 사랑합니다, 당신이 그랬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부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딜 때 몸과 마음의 일체감으로 영원한 한 팀이 될 거라 여겼던 부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평생 한 방향으로 함께 걸어갈 거라 의심하지 않는 사이. 살다 보니 너무 꿈같은 먼 얘깁니다 하는 사람도 서로에게 각별한 부부를 만나면 아름다워 눈길이 오래 머물 듯싶다.
내가 일하고 있는 건너편에 중년의 부부가 책 한 권씩 들고 나란히 앉는다. 내 시선이 닿는 정면이라 그냥 저절로 그들의 동선이 눈에 들어온다. 부인이 읽던 만화책의 한 페이지를 남편에게 보여준다. 남편도 함께 웃는다. 부인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다. 그때 알았다. 부인이 지금 투병 중인 것을. 성글게 남아있는 머리카락을 남편이 괜찮다는 듯 쓰다듬어 준다. 부인의 손을 잡고 도란도란 말 건네는 남편. 지금 이 순간 화살기도를 해본다. "건강하세요. 꼭 이겨내실 거예요. "
'짝, 하나, 나란히, 평생 친구, 사랑합니다. 당신이 그랬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내 앞에서 책 읽는 부부의 모습에서 카피라이터 정철의 '부부'를 확인했다.
문정희 시인의 '부부'란 시도 생각난다. 이 역시 부부의 세계에 사는 분들이라면 오글거리는 사랑 표현에 익숙지 않더라도 '그렇지~ 그게 부부지'라고 쉽게 공감할 듯싶다.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