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수제비
한달에 한번 정도 정장 입을 일이 생긴다. 7cm짜리 힐도 같이 신는다. 난 옷에 따라서 행동거지가 달라지는 위선적인 사람이라서 동네에서 츄리닝에 후드 입은 날에는 팔 다리도 휘적휘적 움직이고 하품도 입 쩍쩍 벌리며 하지만, 정장에 힐 신은 날에는 왠지 골반도 튕기게 되고 표정은 차가워진다.
오늘은 그렇게 날 위선적으로 만드는 정장을 입은 날. 저녁은 밖에서 혼자 먹어야 했다. 어쩐지 오늘 나의 착장은 스타벅스에서 뇨끼 원 플레이트와 어 컵 오브 티를 즐기기에 적합해보여. 신촌역 계단을 또각또각 소리를 확실하게 내며 연세로 스타벅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현대백화점 뒤 좁고 지저분하고 가끔 지나다녔던 그 골목에 수제비를 파는 집이 있다는 게 갑자기 정말 불현듯 생각났다.
사실 그 골목인지 그 다음 골목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 순간 떠오른 건 좁고 지저분하고 가끔 지나다닌 그 골목 근처에 '신촌 수제비'를 본 것 같은 정말이지 수제비처럼 뚝뚝 끊기고 얇은 기억 뿐이었는데, 스타벅스로 가던 발걸음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 골목으로 향했다. 발소리도 또각또각이 아니라 어쩐지 토벅토벅으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촌 잔치국수, 신촌 부대찌개, 아하 다음 집이 신촌 수제비로구나. 신촌 수제비는 진짜로 그 골목에 있었고 나는 아주 반가워졌다. 미닫이문을 여니 훅 끼치는 짜고 따뜻한 공기. 메뉴는 4000원짜리 신촌 수제비와 2000원짜리 김밥 뿐이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수제비 한 그릇 먹고 가겠다고 외쳤다.
정작 수제비 맛은 되게 별 거 없었다. 호박 조금, 당근 조금, 파 조금 들어간 보통의 하얀 수제비. 먹다가 질리면 넣으라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고추장 다데기. 별 거라고 느껴진 건 아주머니 직원들의 노래 토론과 나의 방문 사실 그 자체였다.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 직원들은 길면 기차인지 길면 바나나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멜로디를 읊조리셨다. "길면 기차~" "아니여 길면 바나나~이거지." 난 이 토론을 들어야 하는 내 상황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난 왜 슬렉스에 힐을 신고 신촌 노포에서 혼자 수제비를 퍼먹으면서 길면 기차인지 바나나인지에 대한 토론을 듣고 있는가.
가끔 이런 방문이 있다. 음식보다도 그 음식을 만나기까지의 여정이 더 기억나는 방문. 음식의 맛보다 음식을 먹는 상황이 더 또렷한 방문. 아무것도 뚜렷해지는 건 없고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고 이게 좋은 경험인지 나쁜 경험인지 알 수 없는데, 평가보다는 기록에 대한 욕구가 앞서는 방문. 그래서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얘기를 주저리 주저리 길게 쓰게 되는, 그런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