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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忠臣과 간신奸臣

한 끗 차이

by goeunpa Mar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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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멸망으로 이끈 혼군昏君 곁에는 늘 간신奸臣이 존재했습니다. 선현들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해로운 신하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 간신의 존재를 경계했어요.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은 『설원說苑』에서 해로운 신하의 종류를 구신具臣·유신諛臣·간신奸臣·참신讒臣·적신賊臣·망국신亡國臣 등의 육사신六邪臣으로 정리했습니다.*1)

구신은 단지 머릿수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 유신은 아첨하는 것에만 급급한 신하, 간신은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신하, 참신은 남을 짓밟기 위해 참소를 일삼는 신하, 적신은 반역이나 불충의 하극상을 일으킨 신하, 망국신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신하라고 했죠.


고려高麗의 학자 이곡李穀도 『가정집稼亭集』에서 ‘신하’의 종류를 중신重臣과 권신權臣, 충신忠臣과 간신姦臣, 직신直臣과 사신邪臣의 여섯 가지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2)


중신重臣과 권신權臣

중신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채 대의를 주장하여 혼란을 수습하는 신하, 권신은 세력에 의지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사람들은 압제에 시달리지만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 꺼내게 만드는 신하입니다. 이곡은 권신도 한 시대의 안위를 좌우하며 사태를 진정시킬 수는 있다는 점에서 중신과 권신이 유사할 수는 있으나, 국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고 봤어요.


충신忠臣과 간신姦臣

충신은 자기 집안일은 잊고 나랏일만 생각하여 임금을 위해 자신을 버리며 오로지 의리만을 따르는 신하입니다. 간신은 충신의 정반대로, 번지르르한 말과 흉계로 임금을 기만하고 백성을 우롱하며, 급박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임금을 앞세우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밀어 구덩이에 빠뜨리고 그 안으로 돌까지 굴려 떨어뜨리는 신하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정몽주 선생 묘. 정몽주는 저물어가는 고려 왕조의 존속을 외치며 목숨을 다함으로써 충신의 대명사가 된 인물입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직신直臣과 사신邪臣

직신은 그 명칭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직언을 아끼지 않는 신하입니다. 오직 임금을 불의에 빠뜨리거나 백성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까 걱정되어 거리낌 없이 직언을 하며 죽은 뒤에야 그것을 멈추는 신하를 뜻하죠. 사신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따르지 않고 올바른 길을 향하지 않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불온한 짓을 저질러 결국 재앙과 난리를 부르고 위망危亡을 뒤따르게 하는 신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통상 말하는 '충신'은 이곡이 말하는 '중신·충신·직신'일 것이고, ‘간신’은 '유향의 육사신+이곡의 간신·사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신도 권력을 남용하여 군주를 억압하고 결국 나라에 혼란을 야기했다면 간신으로 분류할 수 있을 거예요. 역사에 그 이름을 어떻게 남기느냐는 그야말로 한 끗 차이죠.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권신과 간신이 존재했습니다. 그중 두 가지 사례만 살펴볼까요.


멸망한 나라의 후손이었으나, 사후 왕으로 추봉된 전무후무 레전드 충신

'신라의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누가 떠오르시나요? 아마 열 중 아홉은 김유신金庾信일 겁니다. 열이면 열 일수도 있겠네요. 김유신의 집안은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의 증조부가 법흥왕 때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금관가야 제10대 왕, 재위 521~532)입니다.

 전구형왕릉. 구형왕의 무덤이라 전하는 것으로, 경남 산청에 있습니다. 무덤이 아니라 돌탑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 시대 신라新羅의 대표적 충신 김유신은 신라 역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든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신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신라 제29대 왕, 재위 654~661)의 처남이자 문무왕文武王(신라 제30대 왕, 재위 661~681)의 외삼촌이었으니 그 권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죠.


김유신의 위상은 그가 받았던 관등에서도 드러납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그에 대한 포상 과정에서 김유신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최고 관등을 받았습니다.*3) 각간角干*4)이란 신라 17관등 중 최고위 관등으로, 김유신이 받은 태대각간은 최고위에서도 무려 2관등을 높인 특수한 자리였습니다.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김유신은 죽을 때까지 왕과 나라에 충성함으로써 자신의 본분을 다했어요.


그의 충심을 신라 왕실에서 얼마만큼 인정했는가는 흥덕왕興德王(신라 제42대 왕, 재위 826~836) 때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는 것에서 알 수 있죠. 살아생전 신하의 위치였으나 사후 왕으로 추봉된 사례는 김유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레전드라 할 수 있어요.

경주 김유신묘. 규모 면에서 왕릉급 무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권력을 잡은 권신이었으나 간신으로 분류되는 대표적 인물로 조선朝鮮의 임사홍任士洪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당대에 실력으로 이름을 날렸고, 중국어에도 능통한 인재人才였어요. 그는 효령대군孝寧大君*5)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세 아들 중 첫째 임광재任光載와 셋째 임숭재任崇載 역시 왕실과 혼인을 맺어 권력의 핵심에 위치했습니다.


임사홍은 성종成宗(조선 제9대 왕, 재위 1469~1494) 때 다른 대신들의 격렬한 탄핵을 받아 잠시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연산군燕山君(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5~1506) 즉위 후 화려하게 정계로 복귀했습니다. 연산군이 많은 이복동생 중 특별히 이뻐했던 휘숙옹주徽淑翁主의 남편이 임사홍의 3남인 임숭재였기 때문이었어요.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유배 기간 동안 갈았던 복수의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성종이 폐비 윤씨 사건을 자신의 사후 100년까지 언급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긴 것도 무색하게 임사홍은 연산군燕山君(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1506)에게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알려 갑자사화甲子士禍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이것으로 자신과 대척점에 선 인물들을 거침없이 숙청하였고, 아들 임숭재와 함께 전국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왕에게 바치는 전대미문의 관직까지 맡아 성실하게 '연산군의 충신'으로 활약했습니다.

연산군묘. 연산군은 폐위되었기에 '능'이 아닌 '묘'입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사홍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사후 부관참시剖棺斬屍*6)까지 당함으로써 그 말로 역시 전형적인 간신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습니다.


권력의 곁에는 언제나 아첨의 무리가 꼬이기 마련입니다. 그 와중에도 충신의 직언을 구분해 들을 줄 알았던 이는 역사상 명군으로 이름을 남겼으며, 간신의 꼬임에 넘어간 이는 결국 혼군이 되어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일이라 치부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 『說苑』, 卷2, 臣術.

*2) 『稼亭集』, 卷7, 「說」, 臣說-送李府令歸國.

*3)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6, 文武王 8年(668).

*4) 이벌찬伊伐飡, 서발한舒發翰, 각찬角粲 등의 이칭異稱이 존재합니다.

*5)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 재위 1400~1418)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의 형인 그 인물 맞습니다. 효령대군은 성종 때까지 장수하며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았어요.

*6) 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중죄인에게 내려진 극형으로, 무덤을 파고 관에서 꺼낸 시체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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