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 다했을 때의 아픔은 여전하다.
Anna, 그녀가 떠난다.
그녀의 아들 Noah(노아)와 딸 Hana (하나)와 함께 아빠가 있는 미국으로.
언제나 문을 노크하며 ‘놀아도 돼요?’라는 노아의 목소리와 얼굴이 벌써 그립다.
유달리 따뜻하면서도 어진 아이 노아.
끊임없이 말하는 아이.
정말 쉬지 않고 말을 한다.
우리 아이 생일 파티 준비로 분주할 때 뒤에서 나를 4번이나, 그 말로만 듣던 ‘백허그’를 해준 아이.
많은 음식과 게임을 준비해줘서 ‘Thank you’라고 거듭 말하며
야밤에 한국 컵라면이 최고라고 허겁지겁 먹던 아이.
Anna는 독일인이지만 남편은 유태인계 미국인이다. 코비드가 시작이 되고 남편은 진작에 미국으로 다시 발령을 받아 떠났다. 결국 1년 남짓 홀로 자녀들과 생활을 하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남편에게 가기로. 미국보다 베트남이 더 안정 적이다 판단했고, 시간이 지나면 코비드 감염자도 줄어들 것이라 판단했다. 최소 호치민에서는 아이들이 학교를 통학할 수 있고,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70프로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했기에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 이별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
우린 서로 알몸을 보여주기로 동의했다.
어디서?
나만의 지상 난원 ‘만**’ 한국식 ‘목욕탕’에서.
수요일 이른 아침 8: 40분 ‘샬롬’ 커피숍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Anna는 새벽 운동 요가를 마치고 난 새로 시작한 Qigoing (기공) 운동을 마치고 서둘러 만났다.
설레는 미소를 보이며 멀리서 손을 흔드는 Anna.
항상 시원하게 웃는 그녀의 웃음이 난 좋다.
베트남에도 한국식 목욕탕과 때밀이가 있다. 찜질방도 있다.
목욕탕의 소중함. 혹시 느껴 보셨나요?
목욕탕 존재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 위키백과사전에서 목욕탕 유래와 기원을 찾아보았다.
<고대 로마의 목욕탕>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에서는 수도시설을 통해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서 목욕탕이 번성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에서 목욕탕은 로마 시민의 여가시설로 쓰였다. 실례로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목욕탕을 지어, 로마 시민은 대형 목욕탕에서 저렴한 가격에 목욕을 할 수 있었으며, 책방이나 운동시설, 식당 등도 제공되었다. 이러한 목욕의 인기는 중세 유럽에도 전해져서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공중목욕탕이 100여 개나 되었다.
<대한민국의 목욕탕>
일본의 영향으로 1924년에 평양에 첫 공중목욕탕 겸 대중목욕탕 영업이 시작된 것이 첫 근대적 목욕탕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일본인 손님이 많고, 한국인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때밀이라는 특유 직업과 목욕업을 겸하는 찜질방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목욕 문화는 크게 발전했다. 대표적인 서민 문화로, 1990년대까지 목욕탕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개인 샤워실의 보급과 찜질방 등 대형화로 전통적인 목욕탕이 쇠퇴해 가고 있다. 목욕탕 안에는 사우나 시설이 있는 것이 보통이며, 탕도 온탕, 냉탕, 쑥탕 등 다양하다. 대한민국의 대중목욕탕은 대부분 7세 이하의 아동을 대상으로 소인 요금을 적용한다. - 출처 : 인터넷 위키백과 -
(목욕탕이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니. 엄청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군. )
목욕탕은 나에게 고귀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한 곳이다.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목욕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보니 이런 유치한 운율까지 떠오른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곳.
미소(?)가 저절로 희죽희죽 지어 지는곳.
40도씨 따끈따끈한 탕 안에서 ‘오~’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오는 곳.
비누 냄새와 거품에 취해 황혼으로 정신이 떠나 버리는 곳.
비록 45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찬란한 행복감에 젖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황홀한 그곳.
목 욕 탕
베트남 현지 목욕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좀 해보자면,
한국 목욕탕 사이즈 4분의 1 정도 되는 곳에서 붐비지 않고 또 어쩔 땐 혼자 그 자그마한 목욕탕을 전세 낸 듯 전 체를 다 사용할 때의 기분은, 마치 왕실 여왕이 대접받는 기분이다. (왕실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여왕이 되어본 경험도 없어 잘 알지는 못하나, 호치민에 있는 한국식 목욕탕은 나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 ) 마치 가뭄에 가끔 단비가 내려 메마른 땅을 촉촉이 보담아 주듯, 두통과 혈액 순환이 되지 않거나, 관절 때문에 손가락과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을 때,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두 눈을 살짝 감고서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기를 40여분 정도 반복하고 나오면, 나의 몸뚱이는 깃털이 풍~성한 날개라도 단 듯 훨훨 날아갈 것처럼 컨디션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아 두 엉덩이가 실룩실룩거린다. 음악이라도 있다면 장단에 맞추어 줌바 춤 까지 출 기세다. 마치 몸이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듯이.
" 이 몸뚱이가 황홀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라며~
또 하나 더, 온탕과 냉탕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반복 외에 한 달에 한번 정도 나의 영혼과 정신을 온전히 책임져 주는 때밀이가 있다. ( 다른 이야기 이긴 한데, 신기하게도 목욕탕에서 난 참 많은 글감이 떠오른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때를 미는 동안 뛰쳐나와 메모를 하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생각이 텅 빈 머릿속을 꽉 채웠다.서둘러 집에서 그 생각들을 글로 옮겨 적고 싶어 노트북을 펴면 순간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글을 누가 읽겠어’ 하고.. 그리고선 몇 줄 적다 만 글이 수십게. 부쩍 최근에 더욱 그러하다. 고백하건대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계약까지 했지만 나의 글이 실리지 않고 있다. '좌절감'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아직도 한참 멀었나 보다. 그 이후 더욱 그런 듯하다. )
다시 목욕탕 이야기로 돌아와서.
머릿속을 빈 깡통처럼 텅 텅 비운채로 벌러덩 누워 있자면 나의 정신은 황혼으로 헤엄치다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때밀이 침대에 머리를 눕히는 순간 세안을 해 주고 얼굴에 시원한 오이를 척척 걸쳐 올려 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때밀이 아줌마의 강 약 조절이 섞인 손맛으로 때를 밀고 대략 5분 정도 되는 전신 맛사 서비스를 받고 나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특히 샴푸와 두피 맛사를 받을 땐 지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속으로 '아!' 외치고 있다. 마무리는 우유로 전신을 매끈하게 발라준다.
Anna는 내가 가끔 나만의 왕국(목욕탕)에 다녀오는 것을 알고선 항상 가보고 싶어 했다. 독일에도 야외 스파가 있고 그녀의 엄마가 스파 광이라는 말과 함께 진짜로 가보고 싶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다.
드디어 오늘이 그날. 하루 전날 Anna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Are you ready to be a Queen?”
She says.
“ Yes. I am. I really need to be relaxed after the interview with U.S Embassy.”
앞서 설명한 목욕 때밀이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Anna의 두 눈이 휘둥그래 졌다.
' I feel wonderful.'
피부를 고려해서 커피 스크럽 혹은 코코넛 스크럽을 권했지만, 굳이 내가 하는 때밀이를 하겠다는 그녀. 나란히 누워 때밀이를 마치고 10분 정도 짧은 사우나를 함께 했다.
오~~~ 그녀는 역시 사우나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여자였다. 저혈압이라 주로 온탕과 냉탕을 즐겨하는 난 아주 가끔 사우나를 하기도 한다. 오늘 Anna와 함께 1시간 정도의 때밀이가 끝난 후 추워진 몸을 달래고자 함께 사우나에 들어갔다.
Anna는 사우나 '고수'였다.
새로운 것을 배웠고 엄청난 열기에 난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그녀가 한수 가르쳐 주었다. 독일과 유럽에서는 다들 이렇게 한다면서.
물 한 바가지를 사우나 전기스토브에 붓고선 갑자기 일어서서 큰 타월을 반으로 길게 꽈배기처럼 꼬아서 잡았다. 한 팔로 그 꽈배기 타월을 높이 처 올려 들고 헬리 콥터 날개처럼 마구 잡이로 공중에 타원형을 그리듯 윙윙 돌렸다. 나체로 서서 열심히 팔을 휘젓는 그 녀를 보는 순간 웃음이 '빵' 하고 터쳤다. 순식간에 굉장한 열기가 번져 유리에 하얀 서리까지 낄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좁은 사우나 안을 꽉 채웠다. 독일에서는 이 직업을 가진 전용 직원이 따로 있고 대부분 유럽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 했다. 신기했다. 그렇게 2번 정도 공기를 휘젓고 나서는 지쳤는지 “ Let’s go for something to eat.” 먹으러 가자고 했다.
두 볼이 잘 익은 토마토 마냥 빨개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면서 샌드위치 집을 데려갔다.
( 참고로 우리 둘이 사우나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우리 둘을 유리 너머로 놀란 듯 쳐다만 보더라.)
둘 다 새벽 운동 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목욕탕을 간 터라 매우 배가 고팠다.
그녀가 데려간 샌드위치 가게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자연을 담은 샌드위치 가게였다. 골목 안에 숨어 있어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난 몰랐던 곳이다. 한입을 베는 순간 눈물이 날정도의 올리브, 허브, 치즈 풍미가 입안을 듬뿍 채웠고, 큰 사이즈라 반쪽만 먹을 생각에 반으로 슬라이스를 부탁했지만, 결국은 그 자리에서 홀라당 먹어 치웠다.
글을 적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별은 나에게 어렵다.
돌아오는 토요일 다시 한번 피자 트럭 파티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마지막 파티가 될듯하다.
일요일 그녀는 떠난다.
Anna와 무척 가깝거나,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거나 뭐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그저 한 아파트에서 오고 가며 인사하다 어쩌다 알게 된 그런 사이.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를 돌고 있는 그녀. 아이들 픽업 시간 종종 마주치던 그녀. 저녁 6시 이후 함께 아이들을 찾아 삼만리에 동참하던 그녀.
그녀의 미소는 좀 오랫동안 나의 마음 한켠에 머물듯 하다.
안녕. 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