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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Jan 16. 2021

베트남 호치민 새댁 (마담) 장보기 역사 유례.

그녀들이 이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14여 년 전 어느 날 하루입니다.


“오늘은 벤탄시장 들렀다가, 과일 물류 창고로 갈 거야. 다들 오케이?”

(그녀는 부산에서 왔다. 사투리가 섞여 있지만 투박하지 않고, 조신한 척 흉내 내려 하지만 여장부의 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말투. 인도네시아에서 10여 년을 살다 남편 따라 호치민으로 이주했다.)

“네~~~ 엡!!”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다. 과일 물류 창고를 간다니. 역시 언니였다.)


앞좌석에 호치민 베테랑 마담 왕 언니가 앉아 있고 뒷 자석에 3명 호치민 새댁들이 쪼르륵 맨살을 맞대고 옹기종기 끼어 앉았다. 한 명은 나랑 동갑, 다른 한 명은 2살 어린 동생. 이노바( 7인승 차 Innova) 맨 마지막 뒷 자석은 접어 올린 뒤 빈 아이스 박스를 세워 두었다.


벤탄시장 <출처pintrest>

'집합 시간은 새벽 6시 00분. 아파트 B동에서 출발.'

보온병에 따뜻한 맥심 커피를 타서 나온 대빵 언니는, 준비해온 종이컵에 조금씩 나누어 따라 준다. 역시 그녀는 다르다. 항상 베푸는 그녀. 세월이 지나 나이를 먹게 된다면, 그녀처럼 이라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달달한 달고나처럼 맛난 맥심. 달콤한 맛이 혀끝에 녹아들며 축 쳐서 아래로 늘어져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잠이 서서히 깬다. 부스스하고 퉁퉁 부은 얼굴들이 언니 커피 탓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수다가 시작된다. 기사 아저씨는 한산한 새벽 도로를 질주하신다. 평일 새벽에 회사도 아니고 시장을 간다고 마담들이 불렀으니, 어여 도착해서 베트남 카페덴 (블랙커피)를 한잔 쭉 들이키고 싶으셨겠지.

커피와 아울러 왁자지껄한 수다와 함께 어느새 도착한 벤탄 시장.


이곳저곳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우린 바로 직진.

저 뒤쪽에 위치해 있는 해산물 가게를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많은 가게들을 가로 질러간다. 한국 마담 4명이 새벽부터 졸래졸래 움직이니, 시장 상인들 시선 집중은 너무나 당연한것이고, 그들도 우리를 보고선 안다. 여행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14여 년 전 이곳에 외국인 거주자가 지금처럼 넘쳐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우린 슈퍼 스타. 왜소한 베트남 살람들 덩치에 비해 우리는 컸다. 아무리 가냘픈 여성이라도 생김새와 피부톤이 다른 탓에 쉽사리 눈에 띄었다. 베트남 문화 특징상 외국인에게 관심이 많고 호기심이 많아 실실 웃으며 말을 거는 사람들도 많다. ‘응어이 한꾸억?’ (한국사람?)하면서 말이다. 어찌나 다들 노골 적으로 버젓이 쳐다보시는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 시선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서둘러 양팔에 금실 팔찌 5개 이상을 차고, 양귀에 옥 진주 귀걸이를 하고, 양손가락에 알사탕만큼 큰 반지를 끼고, 목에 금 목걸이 2줄을 치렁치렁 둘르고 서, 빨강 립스틱에 짖은 화장을 하고 계신 ‘벤탄 생선 가게 아주머니’에게로 향한다. 알록달록 고쟁이 바지에 검정 고무장화를 신고 있어도, 그녀의 부티(부자 사람 느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철 흘러넘친다. 아침 이른 시간 그녀에게 가지 않으면, 도매상인들이 갈치, 고등어, 침조기, 조개, 박대, 오징어, 꽃게, 새우 등을 싹 쓸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부터 움직였다. 유일하게 그녀만이 한국사람들이 즐겨 찾는 생선을 판매했다. 요즘도 그녀는 그 자리 그곳에 있다. 무조건 제일 화려한 언니를 찾으면 그녀다. 그분 옆에 조개 파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아직도 그 할머니는 나를 기억할까...건강하시겠지? 조개 3개씩 더 얹어 주셨는데...


벤탄 내부 시장/ 해산물 파는 코너  <출처: Pintrest->


‘어머, 오늘 운 좋아. 먹갈치가 아니고 은갈치야 은갈치’

(왕언니가 외친다. 그녀의 가족사랑, 자식 사랑이 함께 묻어져 나오는 함성이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한국과 익숙한 모든 상품과 음식 먹거리는 너무도 맑은 날씨 아래에, 그러나 무료한 하루 삶 중 최고의 선물이었다. 4계절 내내 여름인 이곳, 유난히 쨍쨍한 날씨는, 우리에게 우울을 한 아름 실어 나르기도 했다. 향수병 같은 그런 그리움...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 우린 서로 마치 온 세상을 가진 듯한 기쁨으로 갈치를 구매한다. 한번 갈 때마다 생선 종류를 골고루 다 장만한다. 오징어와 한치 새우도 함께 장바구니에 담는다. 멋진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손질을 하고 핏물을 씻어낸 뒤 소금까지 솔솔 뿌려주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므로, 우리는 야채 코너로 향한다. 달랏 야채 파는 곳이 두 군데. 각자 흩어져 필요한 야채를 구매하고 생선가게 앞으로 다시 집합했다. 그 당시 달랏 감자, 배추, 무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었다. 달랏 배추와 무는 한국 종자처럼 모양도 그 생김새도 맛도 얼추 비슷하다. 토마토 역시 베트남 남부 쪽 딱딱하고 길쭉하면서 동글한 토마토와 달리 우리나라 찰 토마토처럼 옆으로 푹 퍼진 타원형 생김새에 과즙이 쭉 나오는 크고 튼실한 토마토를 구매할 수 있었다. 얼추 장을 보고 생선가게 아줌마에게 간다.

생선을 회수할 때 얼음도 함께 얻어 아이스 박스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은 뒤, 야채 코너 아저씨를 기다린다. 야채를 4명이서 두루두루 이곳저곳에서 제법 많이 산 탓에 야채가게 아저씨가 철재로 된 캐리어로 벤탄 4번 출구 앞 , 차 있는 곳까지 운반해 주셨다. 쪽파 한 단도 서비스로 넣어 주셨다. 베트남 사람들의 잔정이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우리는 허기가 졌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던가.

“쌀국수 한 그릇 먹고 과일 물류센터로 가자.” 왕언니의 부름이다.

일동 기다렸다는 듯 경쾌히 "좋아요~~~!” 하고 대답한다.

쌀국수를 먹을 때 난 고추를 국물에 넣는다. 노랑 초록이 섞여 있는 큰 땡초 같은 고추가 베트남에 있다. 빨강 작은 땡초 보다 갑절이나 매운 고추. 퍼 국물에 3토막을 넣은 뒤 휘이휘이 휘젓는다. 고기와 마늘을 소스에 찍어 쌀 국수면 위에 척 걸쳐 한 그릇을 후딱 해치웠다. 얼큰한 국물을 내기 위해 넣은 고추가 면발과 함께 우연히 입안으로 들어왔다. 맵다 못해 쓴 맛이 입안에 퍼지고 톡 쏘는 느낌이 혀를 찔러 입안이 아리송해진다. 이마에서부터 목으로 땀이 쭉 흘러내리고, 눈물 콧물이 질질 나온다.


먼저 쌀국수 한 그릇을 비운 나는 아래층 커피빈으로 내려가 입안에 맴도는 매서운 맛을 누르기 위해 아이스 캐러멜 라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핫 라떼, 아이스 라떼 주문한다. 우린 먹고 싶은 커피 한잔을 들고 다시 출발한다. 제2의 장을 보기 위해. 티삭 거리에 있는 한국 마트까지 들릴 예정이다. 맞은편에 위치해 있던 안남 고메 (수입식품 파는 곳)까지 간 김에 항상 들른다. 지금은 없어졌다. 다른 곳곳에 더 크게 생겼다.


일군 시내 ‘타 이반 릉’ 쪽에 과일 창고 가 있었다. 이곳에서 과일을 벤탄, 호치민 소 도매상점으로 납품을 한다고 했다. 어찌어찌 왕언니가 알아낸 곳이다. 그 당시 최고의 시장 유통 정보를 보유하고 계신 언니 덕에 먹고 살기가 풍요로웠다. 컨테이너에서 바로바로 과일 박스를 내어 주었다.

우린 뉴질랜드 (Jazz 브랜드) 사과 한 박스, 오렌지, 체리 한 박스를 구매했다. 지나치도록 저렴한 가격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 당시 한 박스에 60~70만 동 줬던 기억이 난다. (3만 원 정도)

또 가끔 왕 언니는 한국 공산품으로 꽉 채운 택배를 배로 받고서 우리에게 김 한봉 달, 건미역 한 봉지, 그리고 라면을 툭툭 던져 주기도 했다. 언니는 아낌없이 베풀고 베풀었다. 그 사랑 덕에 우린 튼튼한 호치민 아줌마로 성장했다. 결혼식만 올리고 호치민으로 바로 오게 된 나는 이곳에서 살림을 배웠다. 베트남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왕언니 덕분에 한 달 정도 먹고살 수 있는 해산물을 한 가득 손질해서 냉동실에 꽁꽁 얼려 두었다. 바라만 보아도 풍족함과 풍성함에 절로 뿌듯해진다. 과일 역시 서로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냉장고에 야채와 과일이 숨 쉴 공간 틈 조차 없을 만큼 힘껏 채워 넣었다. 동시에 마음도 한가득 채워졌다. 아이도 없었던 때라 한 달 넘어서 까지 두고두고 먹을 수 있었다. 덕에 몸무게도 함께 늘어나더라.


그 많은걸 어떻게 장만하고 정리를 하냐고 묻는 다면..

우린 베트남 호치민 마담입니다.

"마담" 들어는 보셨나요?

우리 집에는 2~3시간씩 집안일을 도와주는 살림 메이드, 음식 메이드가 집마다 각자 한 명 정도씩, 도우미가 있었답니다.



할머니 웃음이 좋아서. < 출처 - Pintrest>



살 것 같았다.

살만했다.

그녀들 덕분에 풍요로웠고 오지에서 살아남았다.

그 친구들은 아직도 푸미흥 7군에 거주 중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호치민에 오신지 얼마나 되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이곳은 그들에게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하노이에서 머물다 다시 호치민으로 내려오면서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시 왔다는 말에 그녀들 ‘그럴 줄 알았다며’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고선

가끔 연락도 없이 아침부터 차를 타고 달려온다.

‘나와, 배고파. 밥 먹고 커피 마시게’

라고 호출을 하면

난.

다시.

!’ 하고 쏜살같이 튀어 나간다.


아프다고 하면, 약국에서 약을 지어 온다. 그중 한 명이 베트남어를 베트남 사람처럼 하는 동생이 있다. 다짜고짜 증세를 꼬치꼬치 캐묻고는 로컬 약국에서 약을 지어 온다. 그 약은 한 번만 먹어도 몸이 가벼워진다. 그만큼 약이 세다는 말이겠지.

일 년에 한 번 아무 연락 없이 전화를 걸어도 전혀 어색함 없는 그녀들.

지금은 각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육아와 살림에 매진 중이고 왕언니의 자녀 3명 중 한 명은 결혼, 한 명은 유학, 한 명은 한국에서 대학생이다.


베트남 마트에 대해 적고 싶어 끄적이기 시작했는데, 결국은 지난날의 회상으로 저의 스토리로 끝이 났네요. 다음 편에 다시 마트에 관한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장보기 위해 이럴 필요 전혀 없는 호치민 2021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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