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만 풀리지 않아서 인생이다.

새로 온 본부장님은 내가 겪어본 모든 사람들 중 최악의 인물이었다.

by Jay

뜻하는 대로만 풀리지 않는 게 인생이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개역개정)


백날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고 준비해봤자 그 일의 결국이 결정되는 건 일면 하늘에 달려있다. 때문에, 전혀 뜻하지 않던 곳에서 기회가 찾아와 일이 순적하게 풀리는 경우가 있는 반면,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상황이 막히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게 언제나 내 계획대로만 풀려준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내가 한 노력에 비례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그 노력도 결국 하늘의 도움과 결이 맞아야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가끔은 그런 의외성 때문에 삶이 재미있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은 참 기구한 해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질병에, 사상 초유의 자연재해에, 많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던 불가항력적 상황들 앞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준비해오던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뜻하지 않던 퇴직, 뜻하지 않던 휴직, 뜻하지 않던 결혼의 연기 등등. 신입생들은 학교에 못 가고, 대학교 졸업생들은 취업길이 막히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상 밖'의 일들로 인해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왕왕 듣게 되는 한 해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예상대로라면 2020년에 나는 정규직이 됐어야 했다. 바로 전년도 연말에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성과가 눈에 띄게 좋기도 했고, 그동안 쌓아왔던 성실한 이미지가 나름 빛을 보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내 기준에서는 전환이 안 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내가 거절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데 이상하게 연초부터 자꾸만 일이 꼬이는가 싶더니, 상황이 점점 더 이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충분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서 회사가 나에게 목을 매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지만, 결과론적으론 나의 너무 큰 교만이었음이 증명되고 있었다. 나 역시 조직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버려질 수 있는, '회사'라는 시스템 안의 일개 부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첫 번째 단서는 역시 사람이었다.


이 회사와의 이별을 암시하던 복선들은 1년 반을 함께 해온 본부장님이 급작스럽게 바뀐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회사 전반에 고착화돼버린 경직된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목으로 20년 연초에 회사 내 거의 모든 부서의 본부장님들이 관리부서를 바꾸는 사상 초유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본 조치에 따라 그동안 내 계약직 생활을 쭉 지켜보시던 본부장님도 옆 본부로 자리를 옮기시게 됐다.


그것부터가 나한테는 악재였다. 나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힘을 꽤나 많이 써주시던 본부장님이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시면서 나는 큰 조력자 한 명을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악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새로 오신 본부장님이 내가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최악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새로 온 본부장님은 밑에 사람들의 약점을 빌미 삼아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 특히, 정규직 전환 카드를 걸고 계약직 직원들을 들들 볶아먹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이전 본부에서도 정규직 전환을 미끼 삼아 계약직 직원들을 자기 뜻대로 쥐락펴락 해왔다는 얘길 몇 번 들었다. 들리던 소문대로, 새로 온 본부장님은 개별 면담 자리에서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다'라는 반협박성 멘트로 나를 압박했다. 본부장의 좋은 평가가 없이는 정규직 전환 심사에 올라가는 것조차 사실상 어렵다는 걸 너무나도 악랄하게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업무적으로도 재앙이었다. 새로 온 본부장님은 고집이 엄청 셌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 안에서만 판단했으며, 아랫사람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쉽게 짜증을 내고 심한 말을 내뱉기도 일쑤였다.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탓에 업무에 자율권을 일절 주지 않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손아귀 안에서 통제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던 비겁한 사람이었다.


또, 쪼잔하기도 했다. 카페에서 먹을걸 사주겠다고 골라보라 해놓고서는 자기가 고른 것보다 더 비싼 메뉴를 골랐다고(고작 500원 더 비쌌는데)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사람과 같이 오래는 일 못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것들 말고도 새로 왔던 본부장님의 안 좋은 점들은 수두룩했다. 무논리, 비합리성, 군대식 상명하복의 문화 조성, 불성실, 그리고 뒤가 구리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절대로 내가 내 일만 잘한다고 해서 나를 좋게 평가해줄 위인이 아니었다. 죽도록 충성을 맹세하던가, 아니면 명절에 선물세트라도 하나 사다 바치던가 하지 않는 이상 자기 힘 들여가며 밑에 사람을 챙겨줄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무능하고 비인격적인 관리질 덕분에 본부 안의 다른 모든 직원들과의 충돌이 연일 계속됐다. '오늘은 또 누구를 붙잡고 생 지랄을 떨려나'라는 생각에 하루 종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제발, 오늘 하루 무탈하게만 끝나기를'. 오랜만에 입사 초반처럼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다시 받았다. 아마 다른 동료들도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조직 전반의 분위기가 다운됐다.


조직의 분위기는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하도 트집을 잡고 진상짓을 해대는 본부장 탓에 모든 업무에서도 병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안 결재를 올려서 승인을 받으려면 족히 30분 이상은 끔찍한 잔소리를 듣고 있을 각오를 해야 하니, 일이 잘 처리될 리가 있나.


일을 잘하고 싶다는 의지도 자꾸만 꺾여갔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밥맛까지 잃었다. 소화도 잘 안되고, 탈도 잘 나고, 몸도 마음도 너무 상해 가는 게 느껴졌다. 얼른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것이 '올해는 내가 이 회사를 무조건 떠나게 되겠구나'라는 내 마음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꽤나 중요했던 2020년에 날 좋게 봐주시던 본부장님이 다른 본부로 자리를 옮기시게 된 걸까? 또, 왜 하필 그 자리에 온 새로운 분이 마음에 드는 구석 하나 없이 꼰대질만 해대는 사람이었을까? 그런 의문 가져봤자 다 부질없다. 그냥,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인 거다.


나에게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굳이 억지로 상황을 바꿔보려 악을 쓰지 않고, 때로는 그저 흘러가는 삶의 결을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나한테 2020년은 그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이었다.


예상대로 그 본부장님은 나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아무 움직임도 가져주지 않았다. 나의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 본인이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다는 소극적인 태도만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랑 이 회사는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정도로 마음을 정리해가야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거 말고도 다른 모든 상황이 나한테 너무 안 좋게 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뚫어내려면 나의 노력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적극적인 어필이 필요했는데(그런 상황 자체가 너무 소름 돋게 싫었다), 새로 오신 본부장님은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일찌감치 마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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