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충분한 값을 치르고 얻어냈을 무엇인가를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떠한 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어내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부딪히게 되는 결정적 순간마다 이 불편한 진실은 항상 발목을 잡는다. 공짜는 없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고백에도, 이면에는 비참하고 처절한 현실을 꾸역꾸역 인내하고 버텨낸 매일이 묻어있다. 아무 노력도 안 했는데 저절로 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수록 그만큼 더 큰 값을 치러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고 싶었고, 또 내가 만들어낸 성과만큼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잘하고 싶었고, 그를 위해 더욱더 자라고 싶었다. 더 많이 경험하고, 학습하고, 빠르게 성장해서 누구도 쉽게 따라오지 못할 만큼 확실한 격차를 만들고 싶었다.
그 마음이 꽤나 간절했기에 나는 남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모여 앉아 '오늘 하루 이런 일이 있었다' 라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저녁 시간도,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 놈들과 풀어내는 회포도, 꿀 같은 주말 오전에 편하게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하며 뒹굴거리는 여유도, 내 일상에서는 점차 사라져만 갔다.
조직에서의 내가 더 주목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평범한 내 일상들이 지워져야 했다. 그렇게, 회사에서의 인정을 위해 내가 포기해야 했던 동등한 가치의 무엇인가는 다른 게 아닌, 결국 '나 자신'이었다.
2019년 연말에 잡혀있던 꽤 중요한 프로젝트의 담당 PM 업무를 맡게 되었다. 전사적 입장에서는 2019년 마지막으로 매출을 당길 수 있는 프로젝트라서, 본부 입장에서는 그 해 목표 매출 달성이 이미 물거너가 있던 상황에서 체면치레는 해야 했기에, 팀장님은 내 정규직 전환을 강력하게 어필해보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이 프로젝트의 진행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한테는 불필요한 사회생활이나 신념을 꺾는 행동 없이 순전히 업무적인 성과만으로 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내서 나만의 대체 불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모두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프로젝트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부담이 정말 많이 됐다. 그래서 더 완벽하게, 더 잘,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끝도 없이 집착했다.
자연스레 퇴근 시간이 늦어졌다. 아니, 온전한 퇴근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렸다. 회사에서도 일 생각, 퇴근하는 길에도 일 생각, 퇴근해서도 일 생각, 하루 종일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걸어가다가도, 잠들기 직전에도 업무에 대한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말 그대로, 업무에 과몰입한 상태였다.
그만큼 몰입을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큰 문제없이 프로젝트는 순항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분주하게 업무를 처리하다 집에 가는 길이면 이상하게 정신이 몽롱해지고 헛구역질이 났다. 그럴 때마다 '난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라는 삶의 근원적 물음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는 계속 진행돼야 했기에 눈앞에 일들을 기계적으로 쳐내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비례해서 지쳐가고 있었다. 감정적 소모가 너무 컸다. 영혼을 갉아먹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건강도 많이 상했다. 특히, 허리가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안 좋은 자세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를 보니까 허리가 상할 수밖에. 병원에서 디스크가 부어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허리에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꾸준히 받으니 다행히 차도를 보이긴 했으나, 덕분에 한 달치 생활비 대부분을 병원비로 다 써버렸다. 기껏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병원비로 다 써버리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돈 벌려고 일하는 건데, 일하다 몸 상해서 큰돈을 쓰고 있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역시, 건강이 최고다).
그뿐이겠는가. 내 취미생활도, 자기 계발도, 인간관계도, 연애도 올스탑이었다. 감히 그런 일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업무만 쳐내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일은 이상하게 하면 할수록 더 쌓여갔고, 동시에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도 계속 커져만 갔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희생한 덕분에 성과는 아주 좋았다. 목표 매출의 2배 정도를 달성했고, 정성적 평가도 좋았다. 윗분들의 칭찬도, 동료들의 인정도 많이 받았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목표했던 성과들을 이뤄 냈는데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허탈한 감정이 더 컸다.
잠깐은 조직에서의 칭찬과 인정에 취해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조직은 또다시 나에게 그만큼의 성과를 요구할 뿐이었다. 조직의 인정에 취해있던 나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성실하게 일 잘하는 노예'에 불과했다. 그 정도의 성과가 다시 나오지 않으면 금세 또 내 존재 가치가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 한없이 종속적인 나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2019년 연말 프로젝트를 끝마치면서 나는 세 가지 정도의 교훈을 얻었다.
첫째, 업무적 성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면 내 삶의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옳으냐? 그건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더 중요한 것을 취하면서 살면 된다. 다만, 모든 걸 다 갖겠다는 마음만큼은 잘못이다. 일도 잘하고, 친구 관계도 좋고, 가정도 잘 챙기고, 취미 생활도 꾸준히 하겠다는 건 욕심이다. 아쉽지만,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둘째, 조직의 인정은 허울이다. 좋은 성과를 만들면 인정받고 좋은 보상도 따르지만 그것들은 결국 휘발될 것들이다. 당장 다음 프로젝트에서 그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못하면 무섭게 등을 돌리는 곳이 사회니까. 때문에, 조직의 인정을 바라며 삶을 던진다는 것은 끝이 없는 사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지워내기를 무한히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살면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건 아니었다.
셋째, 조직의 인정보다는 나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한다. 좋은 성과를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성장했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만이 자신의 대체 불가능성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은 어차피 허울에 불과하니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과'보다는 '성장'이다. 더 큰 성과는 나를 조직 안에 종속시키지만, 더 큰 성장은 나만의 독립적인 대체 불가능성이 된다. 무엇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인가? 이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성장'이었다. 성장 없는 성과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내가 연말 프로젝트를 끝마치면서 얻은 세 번째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