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본이자 뿌리인 종묘와 사직단을 달려보는 문화유산러닝
종묘와 사직?
조선의 다섯 궁궐을 달려보았다면, 이제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를 상징하는 ‘종묘사직’을 달려볼 차례입니다. ‘종묘사직’이 낯설게 느껴지시나요? 혹시 사극에서 **“전하, 종사를 보살피옵소서~”**라는 말,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그 대사 속 ‘종사(宗社)’가 바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즉, ‘종사’는 곧 나라를 의미합니다. 조선에서는 종묘와 사직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거죠. 그럼 종묘와 사직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왜 이 두 곳이 나라를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이야기를 풀어가기 전에, 우선 위치부터 짚어볼게요.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이 자리하고 있어요. 임금이 경복궁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기준으로, 왼편에 종묘, 오른편에 사직단이 위치합니다.
이러한 배치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고 불러요. 좌묘우사는 동아시아에서 도시를 설계할 때 기본으로 삼는 원칙 중 하나였고, 조선 왕실도 이 원칙에 따라 서울의 주요 공간들을 구성했습니다.
종묘 -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 최고의 사당
종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의 사당입니다. 신주는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나무 위에 적어 모시는 것으로, 돌아가신 분의 혼을 상징해요. 조선 시대에는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뒤,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왕들이 계속 돌아가셨을 텐데, 그 많은 신주를 처음부터 다 모실 수 있게 종묘를 지었을까요? 물론 아니에요. 처음에는 정전(正殿) 하나만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모셔야 할 신주가 점점 늘어나자 옆에 영녕전(永寧殿)이라는 공간을 새로 지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정전과 영녕전은 모두 불타버렸고,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두 건물을 다시 세웁니다. 처음 복원된 정전은 7칸, 영녕전은 10칸이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왕들의 신주가 계속 늘어났고, 결국 두 건물은 점차 증축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정전이 19칸, 영녕전은 16칸이 되었고,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이후 추가로 모실 왕이 없어지자, 지금의 종묘는 그 숫자에 맞춰 정확히 신주가 꽉 찬 상태로 남게 되었어요. 참 신기한 우연 같죠?
최근 종묘 정전은 대대적인 수리를 마쳤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08년에 다시 세워졌는데, 그때 사용된 400년 된 목재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게다가 1726년, **영조 대의 증축 당시 상량문(上樑文)**도 확인되었는데요, 이는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거죠. 문화유산을 수리하고 복원하다 보면, 이렇게 과거와 마주하는 순간이 가끔 찾아옵니다. 마치 같은 공간 안에서 시간대가 다르게 흐르고 있는 듯한 경험이에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딸의 방, 책장 너머에서 딸과 아버지의 시간이 만난 것처럼 말이죠.
종묘는 석굴암, 경주, 해인사장경판전과 함께 1995년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라고 해서 종묘대제!라고 하는데요. 종묘 제례와 제례 때 사용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고 문화유산과 무형유산이 함께 등재된 사례예요. 그만큼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한편,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가 율곡로를 개설하면서 두 공간은 분리되고 말았죠. 창경궁과의 연결을 위해 육교를 설치하기도 했었는데요. 2022년에는 드디어 육교를 철거하고, 담장과 문을 복원하며 두 공간을 다시 연결했습니다.
사직단 - 백성의 삶을 지키는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의 공간
종묘가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면, 사직단은 백성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토지의 신(사신)과 곡식의 신(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에요. 기우제처럼 비를 기원하거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지내는 기고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 등 여러 중요한 제사를 지냈어요. 조선시대 왕실에서 지내는 제사는 대사, 중사, 소사로 나뉘는데, 종묘와 사직에서 지내는 제사는 '대사'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여겨졌어요. 그래서 종묘대제, 사직대제라고 부른답니다.
자, 그럼 이제 순라길을 따라 사직단으로 가보도록 할게요.
"순라길이 뭐냐고요?"
‘순라’는 조선시대의 순찰 제도로, 도둑이나 화재 등을 예방하기 위해 밤에 궁궐과 도성 둘레를 순찰하던 제도예요. 도성 안팎의 야간 경비는 국왕이 직접 지휘할 정도로 중요시되었죠.
사직단은 크게 두 개의 제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동쪽에 있는 ‘사단’은 토지의 신에게, 서쪽에 있는 ‘직단’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에요. 각각의 단은 낮게 조성된 흙 제단으로, 주변에 ‘유(壝)’라고 부르는 낮은 담장을 두르고, 그 전체를 다시 담장으로 감싸 하나의 신성한 제사의 공간을 형성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직단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영역이 훼손되었어요. 당시에는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해 일반에 개방했어요. 심지어 현재 단군성전이 있는 자리에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고 해요. 광복 이후에는 경제 개발 논리에 밀려 부지가 더 축소되었어요. 사직단 안에 실외 수영장, 공기총 사격장, 도서관 등이 들어섰고요. 지금은 수영장과 사격장은 철거되었지만,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2020년경부터 사직단의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사직단의 본래 영역을 온전히 되찾기 위해서는 종로도서관, 어린이도서관, 단군성전 등의 철거가 필요하다고 해요. 우리는 2025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오랜 시간 지역사회와 함께해 온 도서관들을 쉽게 없앨 수는 없겠죠. 사실 이 복원사업은 시작조차 쉽지 않았어요.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고, 참 많은 논의 끝에 어렵게 시작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집니다. 앞으로 10년 뒤, 이곳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까요?
완전히 복원된 사직단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처럼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일까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문화유산의 곁을 지키고 바라보는 일.
그 자체로도 우리에겐 아주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요.
햇볕이 조금은 따갑게 느껴졌던 오늘, 우리는 조선 왕실의 뿌리이자 가장 신성시되었던 문화유산인 종묘와 사직단을 함께 달려보았어요. 지난번에 달려보았던 궁궐과는 또 다른 느낌이죠? 궁궐이 정성껏 차려낸 고급진 코스요리 같았다면, 종묘와 사직은 오랜 기간 깊고 정갈하게 우려낸 녹차 한 잔 같은 느낌이에요.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이 있는 공간이었죠. 담장 밖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흐르고 있지만, 담장 안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종묘와 사직을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