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그리다
지난 금요일, 2년간 살던 전셋집을 떠났다. 그동안 여러 번의 이사를 했고, 이삿날에는 늘 신경이 곤두서고 정신이 없지만 이번 이사는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집주인과 부동산 아줌마, 그리고 아랫집 아줌마와의 마지막 결투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사는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사람의 인성이나 성격 따위가 변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테지만, 2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기간이었다. 2년 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링 위에 오른 아마추어 선수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동생의 뒤를 밟아 우리 집 계단까지 뒤쫓아 왔다는 어느 남자를 경찰은 잡지 못했고, 부랴부랴 이사 갈 집을 알아봤다. 무조건 지하철 역과 가까운, 새벽에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주위 상가의 불이 켜 있는 집, 그리고 CCTV 가 있는 집. 그렇게 찾은 것이 응암동 집이었다.
우리 집주인도 급하게 우리 집을 샀다고 들었다. 투자 목적으로 보지도 않고 우리 집을 샀다는 집주인은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였다. 부동산에서 계약을 하던 날 옆에 있던 아저씨를 실장님이라고 부르며, 본인은 회삿일로 바쁘니 이 실장님을 통해 일을 해결하라고 했다. 본인이 갖고 있는 다른 수십 채의 건물도 다 이분이 관리한다면서.
부동산 아줌마는 집주인이 갖고 있는 다른 수십 채의 건물을 자기가 꿰차고 거래할 요량이었는지, 몸에 밴 경로우대였는지, 계약서의 각종 특약을 집주인에게 유리하고 나에게 불리하게 써주었다.
이사하던 날, 아랫집 아줌마가 씩씩거리며 올라왔다. 너무 시끄럽다고 역정을 내며 집안을 쓱 둘러보고는 "여자들만 사나 보네."라고 했다. 나는 죄송하다고 연발 고개 숙이며, 집에 있던 과일을 한가득 손에 쥐어드렸다. 며칠 후 늦은 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워 있는데, 밖에서 문을 쿵쿵 두드렸다. "이 집에 애기 키워요? 지금 몇 신데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짜고짜 화를 내는 아랫집 아줌마. 시간을 보니 12시가 다 됐었다.
이때였던 것 같다. '내가 링 위에 서 있구나. 몇 번 상대에게 쨉을 날려 본 아줌마가 보호구도 하지 않았던 나에게 원투! 원투! 시비를 걸고 있구나.'라고 느낀 것이. "불 끄고 자려던 참이에요. 아이는 없어요."하고 그냥 문을 닫았다. 그날 그녀는 나를 링으로 잡아끌었지만, 나는 그냥 내려오는 것을 택했다.
내가 다시 링에 올라가게 된 것은 이사를 한지 한 달도 안된 겨울이었다. 한파가 몰아쳤는데, 건물의 하수관이 얼어서 동파가 됐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아래층에 살던 아줌마가 현관문을 쿵쿵 치며 나와보라고 했다. 자기 집이 물난리가 났다며, 하필 이 추운 날 세탁기를 돌리는 상식 없는 사람을 속출 중이라고 했다. '속출 중'일이라는 말도 거북했지만, 그 후에 뱉은 말은 그냥 우리 집을 100프로 확신에 찬 말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나 본데, 저희 집 청소비랑 수도관 수리비 청구할 테니 그런 줄 아세요." 방금 집에 돌아왔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았다는 항변은 먹히지 않았다. 나는 이 빌라에 젊은 여자들만 사는 집은 우리 집뿐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남편과 사는 여자들이었고, 401호에서 서른 넘은 아들과 사는 여자가 세탁기를 돌렸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는 링 위에 선 선수가 아닌, 그냥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싸움꾼이었다는 것도. 인상 더러운 남자 친구가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아줌마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올라오지 않았다.
겨울 동파 사건은 또 다른 대결을 불러왔다. 오래된 빌라라 하수관을 수리해야 했는데, 전 세대가 돈을 모아야 했다. 계약하던 날 집주인이 실장님이라고 부르던 남자에게 연락을 해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집을 보고 계약하지 않았느냐, 계약 시에는 문제가 없었고 이사 온 후에 발생한 것이니 그 부분은 세입자가 수리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경우는 법적으로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거라고 하던데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 남자는 "법? 법이라고? 그렇게 법 좋아하면 법으로 해! 소송 해!"라고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겨울 북극한파가 나와 이 남자를 휩쓸어 링 위에 떨어뜨렸는데, 권투 태세를 갖춘 나에게 그는 종합격투기 기술을 썼다.
나는 집을 수십 채 관리한다는 실장이란 남자와 한판 후, 심판에게 SOS를 청했다. "상황이 이런데, 집주인이 이렇게 나오네요."라는 나의 말에 부동산 아줌마는 "집이 많은 사람이라 하나씩 신경을 못 써서 그래. 돈 많은 사람들이잖아. 그쪽이 이해해."라고 말했다. 수리를 집주인이 하는 것은 맞지만, 나한테 이해를 하라고 했다. 논리성이 없는 그녀의 말에 울분이 났고,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리라 다짐했다.
나는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잽을 맞았고, 맷집이 두꺼워졌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싸움의 기술도 간결하고 날카로워졌다.
집주인 또는 집주인의 실장이라는 남자와 전화를 하게 될 일이 있으면 녹음을 했다. 인사는 깍듯하게, 용건은 정확하게. 마지막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인사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심판에게는 정중했다. 집주인이 집을 내놓은 이후 사 개월 동안 부동산 아줌마는 주중이건 주말이건 가리지 않고 손님을 데려왔는데, 그때마다 다이어리에 기록을 했다. 물론 나 역시 반칙 판정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총 스물세 번, 집을 보러 온다는 부동산 아줌마에게 협조했다. 어쨌든 그녀는 심판이었고, 오심마저 절대적인 것이 심판이니까. 그렇게 나는 상대에게 대등한 체급의 선수가 되었다.
마지막 결투를 앞둔 나는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집주인이 집 상태를 꼬투리 잡아 보증금을 깎는다면 "원래부터 이랬어요." 기술을 쓸 생각이었다. 나가는 나보다 들어오는 사람 편에 선 부동산 아줌마가 빨리 짐을 빼라고 재촉할 것 같아, 아침 7시부터 이사를 시작하기로 한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전날 밤잠 안 자고 짐을 싸 놓았다. 이사 아저씨가 오면 바로 옮기기만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마지막 필살기, 남자 친구를 불렀다. "그냥 옆에서 인상 팍 쓰고 서 있으면 돼."
대망의 결투 날. 나의 예상대로 이삿짐이 2시간이나 빨리 빠졌다. 이제 집 상태 확인하고 돈만 잘 받으면 게임 끝이었다. '이 정도면 나도 아마추어는 넘었고, 세미프로 정도는 되지 않을까. 덤벼라, 나도 잽을 날릴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 일로 바빠서 부동산 사장님께 대신 마무리 부탁했어요. 보증금은 지금 계좌로 입금하겠습니다. 전 선생님 앞으로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고 건강하세요. 얼굴 보고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띠로링... 그동안 그렇게 말싸움하고 기싸움하고 했던 사람의 마무리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어른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른이었고, 나는 싸움의 기술을 배웠지만 아직 어른이 아니었다.
집주인의 부탁을 받은 부동산 아줌마가 와서 집을 쓱 둘러보고 말했다. "집을 깨끗하게 썼네. 어디 가서든 잘 살 거 같아. 이사 잘하시고 부자 되세요."
띠로링... 부동산 아줌마도 어른이었다.
그들이 나를 싸움판에 끌고 와 내가 굳은살 박혀가며 싸움의 기술을 익혀 고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악다구니 있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혼자 사는 여자에게 세상은 너무 거칠어. 겨울바람에 얼굴 슭히는건 어쩔 수 없는 거야.'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그 거친 세상과 차가운 겨울바람들은 다 따뜻한 결말을 품고 있었다.
어른은 그렇게 싸우는 것이었다.
진정한 싸움의 기술은 마무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