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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와디디 Oct 04. 2021

내 마음입니다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장장 1년에 걸쳐 스즈키 1권을 끝낸 무렵, 잠시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와 두 달간 지내게 되었다. 첼로를 두 달간 손 놓고 있을 수 없어 처음에 나를 학원으로 인도했던 친구가 다니고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 그곳은 제주의 학원(제주에선 내가 유일한 성인 최고령 희귀템 수강생)과는 달리 성인 취미 전문 학원이어서 다양한 연령과 수준의 수강생들이 모여 합주도 많이 하고 작은 성취를 뽐내는 발표회 성격의 연주회도 자주 열렸다. 이미 지난 1년간 내 친구도 작은 공연을 3번이나 참가해 나의 감탄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내가 올라가 있던 7월에는 하우스 콘서트가 예정돼 있어서 친구는 콰르텟 앙상블의 한 파트로 연습을 시작했다고 했다.

“내 파트에 나밖에 없어. 저번엔 무서워서 도망가다가 원장 선생님한테 붙잡혀 왔어.”

“그래? 그럼 내가 같이 할까?”

1년이 지났건만 아직 활도 제대로 못 잡는 주제에 친구가 한다니까 같이 참여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 팀에서는 친구가 제일 못 한다고 하니 맡겨봐야 얼마나 어려운 파트를 맡길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다음 레슨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뜻밖의 얘길 하셨다.

“이번에 하우스 콘서트에 이제 서너 달 배우신 분 몇 분이 모여 연주를 하는데요, 스즈키 1번 반짝반짝 작은 별이랑, 2번, 3번, 4번 이렇게 다섯 곡쯤 할 건데, 현수님도 같이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사실 현수님 수준에 이 팀에 들어가라고 하는 건 좀 미안하긴 한데요, 그래도 이런 연주도 좋은 경험이니까.”     

스즈키 1권과 2권은 고1과 고2의 차이다. 어른들(숙련자)이 보면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 재기지만 자기들끼린 하늘과 땅 차이. 그러니까 이제 막 고2에 올라가 우쭐한 내게 고1 애들 반에 가서 같이 공부하라는 얘기였다. (선생님의 선의와 별개로 나의 체감 상)  

자존감이 높으면 뭘 해도 괜찮고, 진정한 프로는 노는 물을 따지지 않으며... 나도 남의 일엔 그렇게 말했을 거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일단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고2인데(무려 스즈키 2권인데!) 고1(스즈키 1권의 그것도 1번!)이랑 공연을 하라고?

 “저는 무대 공포증이 있고요, 당황하면 그냥 멈추고요, 모두의 무대를 망칠 거고요.”라고 떠들었지만, 실은 아직 내 실력이 스즈키 1권의 반짝반짝 작은 별 수준이라는 엄연한 팩트가 뼈를 때리게 아팠던 것 같다. 선생님께는 조금만 고민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수업을 마쳤다.


 ‘결국 배운 기간을 초월해서 같이 첼로를 배우는 분들과 합을 맞춰 즐겁게 공연을 마쳤다.’라고 하면 정말 아름다운 결말이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 기본기를 정비하는 상황에 연주회 준비를 하면 어떻게든 또 그 곡들만 잘하기 급급해서 기본기를 신경 못 쓸 것 같아요.”라는 거창한 이유를 대고 거절했다. 사실 육지로 올라와 학원에 다니면서 여성 분 특유의 세심함으로 자세를 봐주시는 선생님으로부터 기본기를 손보는 중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이제 석 달 배운 분들과 같이 공연하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게 1번이었지만, 나만 알고 있는 내 마음속의 진짜 이유는 그들과 함께 하다가 내가 틀리면 어떡하나 너무 겁이 나서였다. 나는 당황하면 미친 듯이 실수를 하다 멘털이 무너져 혼자 산으로 가버리는데, 방구석에서 나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다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니까 고1반에 가서 제일 공부 못하는 고2가 될까 봐 무서웠다는 얘기.     

‘참 못났다. 스즈키 1권, 2권 차이가 뭐라고. 다 거기서 거기구먼.’이란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이게 나라를 구하는 일도 아니고 다 늦은 나이에 즐겁자고 하는 성인 취미반인데 좀 비겁하면 어떤가. 취미 좋은 게 뭔데?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거다. 이 나이에 무언가를 시작하면 어릴 때 조언이나 설득을 빙자한 부모와 선생님의 강요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이 나이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옳은 일 같아서’ 원하지도 않는 일, 너무 많이 하며 살아왔다. 이젠 그만 해도 될 것 같다. 공연을 해보면 경험도 쌓이고 늘기야 하겠지.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것의 가장 큰 목표는 ‘나의 즐거움’ 일 거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비겁한(말이 되나요?) 핑계를 대고 내키지 않는 합주 발표회에서 빠졌다. 나의 첫 공연은 내가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할 거다.

그 정도는 내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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