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고와디디 Oct 05. 2021

만학도 아버지의 클래스

첼로 입문기 <이 나이에 기어이 첼로를 하겠다고>


 제자가 책 좋아하는 걸 알고 분당의 첼로 선생님이 좋은 책을 몇 권 추천해주셨다. 레슨 후에 바로 검색해보니 그중 한 권이 절판이었다. 평소 동네 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하시는 친정아버지께 문자를 넣었다. ‘게르하르트 만텔의 「음악을 연습하다」라는 책이 절판인데 혹시 도서관에 있으면 대출 좀 부탁드려요.’ 아버지의 답이 도착했다. 경기도 성남시 소재 열다섯 개 도서관 중 딱 한 곳, 성남시 중원구의 도서관에 책이 있으니 내일 전철을 타고 가서 빌려다 주시겠다는 내용. 뭘 그렇게까지 하시냐고, 꼭 필요한 책이 아니라고 답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아버지께선 「음악을 배우다」를 들고 우리 집 앞에 나타나셨다. 중년의 딸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하니 여든이 넘은 아버지께서 열 일 제치고 책을 구해 오신 것. 그리고 이게 무슨 어려운 일이냐는 듯 휙 돌아서서 가셨다.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딱히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발 빠른 재테크의 기술과는 담을 쌓은 분이셨던 지라 엄마는 빠듯한 월급만으로 삼 남매를 키우느라 고도의 근검절약 기술을 발휘하며 사셨다. 우리 집에서 크리넥스처럼 보드라운 화장지 같은 건 구경할 수 없었고, 식탁 위에도 두루마리 화장지가 턱 하니 올라와 있었다. 그것마저도 코 푼다고 세 칸 이상 뜯으면 낭비한다고 혼이 나곤 했다. 언니와 연년생이었던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언니 책가방을 물려받았다. (옷을 물려받는 건 당연했으므로 패스하겠다) 그런데 오리털 파카가 처음 한반도에 상륙했을 땐 웬일인지 엄마가 내게도 한 벌 사주겠다며 버스를 한참 타고 모 브랜드의 파격 세일이 열리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반신반의하며 맘에 드는 걸 걸치고 거울을 보고 있는데 엄마가 다가와 속삭이신 한 마디.

“등산 가실 때 아빠도 입으시게 좀 큰 걸로 사자.”

눼에???


그 일화는 우리 집의 오리털 파카 돌려 입기 신공이란 제목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내가 그 파카를 입고 찍은 사진은 팔이 너무 길어서 마치 고릴라 같다.(네, 불태우진 못하고 아직 갖고 있습니다) 그뿐인가 전 방위적으로 절약을 실천하던 엄마는 도시락 쌀 때 쓰던 랩도 설거지를 해서 (빨았다고 해야 하나?) 고이고이 널어두셨다가 다음날 도시락에 재활용하셨다.

엄마의 근검절약 이야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푸는 건 한풀이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엄마를 낯 뜨겁게 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 정도로 절약하며 살던 분들이 자식들의 문화적인 경험을 위해선 통 크게 지갑을 열어젖히셨다는 이야기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고 싶어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당연히 버스를 타고) 다섯 식구가 다 같이 갖가지 문화 경험을 하러 서울 근교를 누볐다. 예전 조선 총독부 건물 자리에 중앙박물관이 있던 때부터 국전이 열리면 그림을 보러 다니기 시작해서 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선 다음까지 미전을 보러 다녔다. 어떤 그림이 좋은 건지, 그림을 어떻게 보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그런 문화의 공간에 먼저 매혹됐던 것 같다. 서울에 오직 그림을 쭉 걸어놓기 위한 커다란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큰 공간에 또각또각 울리는 나의 발소리를 듣는 것도 그냥 좋았다. 어디 전시회뿐인가, 공연이라면, 일찍이 발레, 오페라, 뮤지컬, 연극, 콘서트, 클래식 공연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예술의 전당이 생기기 전에는 세종문화회관이나 호암아트홀 같은 곳을 찾아갔고 잠실 종합 운동장에 쓰리 테너가 방한했을 때도 그 수많은 관중 중에 내가 있었다. (이런 경험은 지금처럼 공연문화가 대중화되기 전인 8,90년대에 누린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영화 같은 경우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처럼 이슈가 된 한국 영화는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다음 날이면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를 다 같이 (다시 다섯 명이 줄줄이 버스를 타고) 보러 가곤 했다. 책에 관해서라면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간략하게 하자면, 우리 집에 가전제품이든 뭐든 수리할 게 생겨서 집에 방문 기사님들이 오시면 “바깥 분이 교수님이세요? 책이 엄청 많네요.”라는 말을 꼭 했고, 한여름 무더위에는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돗자리에 누워 집에 굴러다니는 태백산맥이나 토지 같은 장편 대하소설을 읽는 것이 나의 피서 법이었다.

썰을 풀다 보니 자린고비 극한 체험기 + 컬처 샤워 자랑 대회가 합해진 두서없는 글이 된 것 같은데, 결론은 이렇다.

나의 어린 시절은 금전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문화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어느 가정과 겨뤄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웠노라고. 정세랑 작가의 「지구인보다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어보니 작가님의 어린 시절 집안 분위기도 비슷해서 무지 반갑고 놀라웠다. 물론 그분은 유명한 작가가 되셨고, 나는, 뭐...... 아직 이러고 있지만.

하지만 그런 어린 시절이 자양분이 되어 나는 이 늦은 나이에도 꿈의 악기였던 첼로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를 닮아 주식 투자 공부를 한다거나 나중에 열 배 백배로 오를 땅을 보러 다닐 생각은 하지 않고 절판된 첼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치 임신한 아내를 위해 한 겨울밤, 복숭아를 구해 따온 옛이야기 속 남편처럼, 절판된 책도 찾아내어 바로 다음 날 나타나는 나의 아버지가 계시다. 부모님은 간혹 물려줄 재산도 없는 걸 미안해하시는데 나는 가장 큰 유산을 이미 넘치게 받았다.

두 분, 부디, 오래 건강하시길.

이전 12화 내 마음입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