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2019년 11월
이제 겨울이구나 싶었던 어느 날
난 이혼을 했다.
10년 차 결혼 생활이 하룻밤새 마침표를 찍었단 사실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느라 열정과 노력을 쏟았던 최근 몇 년의 내가 안타깝고 허무했다. 하지만 결정은 빨랐고 성급했고 또 신중했다. 끝인 건가?라는 계속되는 의문에 대한 답은 늘 하나였다. 끝이구나. 그럼 됐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산 세월이 8년. 내가 이혼을 하고 내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이 없는 일상을 살아 낼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옆에 없는 내 모습과 아이들 옆에 엄마가 없는 모습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남편이 양육권을 가져간다 하면 어쩌지, 난 경제력도 없는 전업주부인데 어떻게 하면 내가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고맙게도 전남편은 아이들의 양육권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나에게 일임해 주었고 의외로 쉽게 전남편은 양육권을 포기했다. 사실 난 내가 살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키우기로 결정했다. 이기적으로.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며 보냈던 내 30대 청춘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용한 걸 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잔소리 많고 화내는 엄마보다 화 한번 낸 적 없고 놀아만 주는 아빠랑 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딱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이기적으로 오롯이 나를 위해 하는 선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하룻밤사이에 가장이 되고 보니 역시나 먹고사는 게 걱정이 됐다. 아이들 학원비며 유치원비는 알량한 양육비로 충당한다 쳐도 네 식구가 살아가려면 정말 돈이 필요했다. 한 푼이 급하니 닥치는 대로 어떤 일이든 해야지 마음먹고 알바자리를 구했다. 주변에 육아를 도와줄 이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 하교시간 돌봄 시간 유치원 하원시간에 맞춰서 내 하루 일정이 정해졌다. 경단녀 10년, 별거 없는 서비스직 경력으로 그저 하루 5시간,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의 월급에도 뽑아주어 감사하단 생각만 들었다.
전남편의 짐이 나가고 어린아이들도 우리 집에 무슨 일인가가 생겼구나 하는 눈치를 챈 무렵 나도 참 많은 얘기를 들었다. 아이들 애기 때부터 친했던 동지 엄마들도, 교복치마 함께 펄럭이며 이 꼴 저 꼴 다 보고 살아온 친구들도, 마음은 늘 옆집 사는 우리 언니도, 친정엄마까지 딱 한 명을 빼고 누구 하나 잘했다 말해주기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만 했다. 여자 혼자 세 아이, 게다가 삼형제를 어찌 키우냐고 했다. 바보같이 매번 참던 그 한 번을 못 참아 미련한 선택을 했다고, 네 팔자를 네가 꼬고 있다고 했다. 분명 후회할 거라고도 했다. 맞는 말인 거 같아서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들 하나같이 한마음으로 나 하나 걱정해서 한 말인 것을 뻔히 아는데 거기에다 대고 죽는 것보다 애들 끼고 아등바등 살아보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소리를 지를 순 없으니 그저 한번 웃고 속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2023년,
큰아이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고 매일 울며 학교를 가던 둘째는 동생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등교를 한다. 유치원을 다니던 막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직은 학교에 한번 불려 간 적도 없고 큰 사고가 난 적도 없고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무사히 잘 살아가고 있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것 아닌가. 고작 5-6시간을 일하고 빠듯한 생활비에 매 순간 돈 걱정을 하던 엄마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재취업에 성공했고 아이들도 나도 아빠와 남편이 없는 일상에 나름대로 치열하게 적응을 완료했으니 이만하면 되었지.
아직도 가끔 지인들 중에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그럼 난 제법 여유로운 표정과 몸짓으로 후회는 무슨, 아주 만족스럽고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다 말하곤 한다. 비록 매 순간이 전쟁과도 같고 가끔씩 걸려오는 학교전화에 심장이 벌렁벌렁 하곤 하지만, 매일 새롭고 반복되는 육아 고민을 속깊이 나눌 동지가 없어 외롭지만 적어도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워 편안하게 놀고 있는 삼형제를 보고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단 생각을 하곤 한다. 매일밤 잠든 아이들을 보며 오늘도 나는 잘 살아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