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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구마씨 Mar 29. 2023

나 아빠 만나러 안 갈래.

동상이몽 면접교섭권

내가 이혼 후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은 삼형제와 아빠의 유대감 유지이다. 비록 최고의 남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최고의 아빠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탄탄하게 쌓아 올려진 삼형제와 아빠의 유대감을 꼭 유지하여 나중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삶의 밑거름이 되기를 소망한다.

매일 살부비며 얼굴 맞대고 지내는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빠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행도 보내고 갑자기 나는 시간에도 언제든 만날 수 있게 삼형제와 아빠의 소통도 방해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어른들의 감정은 생략하고 삼형제와 아빠의 유대감 유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아무런 문제없었다. 아이들은 아빠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왔었다. 전남편도 수시로 삼형제와 만나기 위해 종종 우리 집 근처로 퇴근하여 저녁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막내가 아빠집에 다녀와 간식을 먹으며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 엄마 아빠집에 안 갈래요, 난 이제 다신 안 갈 거야!

라고 선언을 한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너무 놀랐지만 놀란마음을 어색한 표정으로 숨기고 아이에게 물었다.

-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사실 일주일에 단 하룻밤, 그것도 저녁에 가서 점심쯤 돌아오는 그 시간이 하루에 알바를 두 개씩 하고 있던  나에게는 정말 꿈같은 자유시간인데, 왜 갑자기 안 간다고 하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지? 전남편이 애들한테 화를 냈나, 아님 내가 상상하지 못할 다른 일이 있었나 걱정이 앞섰다.

속으로는 아이들이 싫어도 아빠랑 시간을 보내야 내가 좀 쉴 텐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진짜 안 갈까 봐.


수많은 물음표와 걱정과 초조한 표정을 숨기고 막내의 대답을 기다리던 나에게 눈물 많은 둘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엄마 나도 안 갈래, 가고 싶지 않아.

-????????????

이쯤 되니 표정을 숨길 수가 없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아니 얘들이 왜 그럴까, 잘 놀고 와 기분 좋게 달달한 시리얼 먹으며 아빠집에서 보던 만화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 갑자기 왜 그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엄마 난 가고 싶어 제발 못 가게 하지 마.

가만히 동생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큰애가 거의 울다시피 하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저기요 선생님, 아무도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너까지 왜 그러세요.


결국 늘 문제가 시작되는 저녁시간의 식탁에 둘러앉아 달콤한 시리얼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자 우선 둘째와 셋째야 우리 차분히 이야기해 보자, 왜 그러는지 혹시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불편했다면 어떤 게 불편했는지.


울먹이며 삐죽거리던 둘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주일 내내 학교 가는 게 너무 힘들고 쉬고 싶지만 아빠랑 만나서 재밌고 신나게 놀고 싶어서 집에 있고 싶은 마음도 참고 아빠집에 갔는데 아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누워서 잠만 잔다고 한다. 심심하다고 말하면 하루종일 TV만 틀어준다고.

그렇게 하루종일 잠만 자다가 일어나 나가자고 하길래 설레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더니 고작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과자봉지 하나를 사서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 건 아빠가 없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삼형제는 아빠집에 가기 전에 아빠랑 만나면 놀이터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어서 뭐를 먹을까 어디를 갈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신나서 갔는데 아빠는 잠만 자느라 놀이터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도 밥도 못 먹었다고 한다.


- 그랬구나, 속상했겠다. 그래 너희가 맘이 너무 안 좋았겠다. 사실 엄마가 그것까진 생각 못했어, 그저 너희와 아빠가 매주 만나는 게 그 자체로 너무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어, 엄마가 생각이 짧았다.



사실 결혼생활 내내 전남편의 잠만보 기질은 항상 문제가 되었어서 나로서는 예상되는 루틴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서운할 상황이었을게 뻔했다. 아니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아이들을 두고 잠만 자다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내가 잠 좀 그만 자고 애들이랑 놀아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삼형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하는 건 나의 몫이다.


-아빠도 너희랑 재미있게 놀고 싶으셨을 텐데 너무 피곤하셨나 보다. 엄마도 일주일 내내 일하다가 주말이 되면 소파에 누워있고 싶어 하고 한두 시간씩 낮잠 자는 거 알고 있지? 너희들도 오랜만에 만나는 아빠와 놀러도 가고 신나는 시간도 보내고 싶은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그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사실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삐져있고 화를 내도 당연한 건데 이렇게 엄마한테 먼저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우선 엄마 생각엔 너희가 서운하고 속상하다고 아빠한테 잠을 자면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진 않다. 아빠도 주말에 편안히 쉬고 나서 회사를 다녀야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니까. 지금 든 생각이지만 오늘처럼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걸 한 달에 3번 정도로 횟수를 조절해서 아빠도 쉴 수 있고 너희들도 아빠랑 즐겁게 놀고 올 수 있게 엄마가 아빠랑 상의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엄마가 아빠랑 상의하고 나서 어른들이 먼저 일정을 조정할 수 있게 기다려줄 수 있을까?


얘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

- 엄마랑 아빠랑 화해했어요? 이제 전화도 하고 얘기도 서로 해요?

놀라며 묻는다.

- 전에 엄마가 말한 것처럼 엄마랑 아빠가 싸웠지만 우리 삼형제의 엄마 아빠인 건 변함이 없고 너희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항상 상의하기로 약속했어. 너희들이랑 아빠가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우리 가족 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니까 당연히 엄마랑 아빠가 얘기를 하고 상의를 해서 결정할 거야.


뾰족한 수가 없는 나는 결국 또 맘 넓은 아이들에게 이해를 부탁하고 있었다.


내 아가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순간들을 기다려야 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 차라리 내가 한번 더 참았으면 그냥 괜찮은 척 넘어갔다면 내 아가들, 나의 삼형제가 불필요한 이해와 기다림 따위 안 배워도 됐을 텐데.

아이들과 한참을 이야기 한 그날 밤 꽤 늦은 시간까지 잠이 들지 못해 한참을 입에 안 댔던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눈물을 한바탕 쏟아내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맞이한 아침, 막 잠에서 깬 따끈따끈한 찹쌀떡 같은 큰 애가 누워있던 나를 가만히 안더니

- 엄마 내가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엄마랑 아빠가 우리 앞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것보다 지금처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아니 이 작은 녀석이 내 맘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혹시 내가 나 모르는 사이 몽유병이 생겨 자는 애를 깨워 앉혀두고 신세한탄을 한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데 태평양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아이는 한번 더 엄마의 마음을 살살 녹여준다.


-우리를 위해서 많이 고민해 줘서 고마워 엄마, 사랑해요. 좋은 아침


난 어떤 복을 받았길래 이렇게 멋진 아들이 내 아들이 된 걸까. 이기적이고 간장종지만큼 작은 마음의 엄마는 아직도 이혼이라는 큰 산 앞에서 매번 무너지는데, 고작 10살인 이 아이는 어쩜 이런 큰 그릇을 가졌을까.

내 아들이지만 정말 멋진 너는 나에게 축복이고 행운이고 행복이다. 종종 실패인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너라는 아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성공이다. 이렇게 멋진 아들 덕에 난 또 기운이 나고 응원을 받고 살아갈 힘을 쌓아간다.

삼형제가 어렸던 시절 내가 삼형제의 우주인 줄 알았는데, 삼형제가 자랄수록 삼형제가 나의 우주가 되어간다. 너희의 넓은 우주 같은 마음덕에 작기만 한 엄마는 오늘도 살아갈 힘이 난다.


외할머니댁에서 신나게 눈썰매 타는 사랑스러운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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