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의 반대말은 감사다
마트에 갔다. 필요에 의해서 간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당장에 마트에 가지 않아도 며칠은 지낼 수 있었을 테니 오로지 필요 때문만에 간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겠다. 마트에 가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닌 쪽에 속하기 때문에, 진열대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즐거움을 찾으러 간 것도 아니다. 단순하게 퇴근 후 시간이 남았고,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고, 이왕이면 저녁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기에 마트로 가게 되었다.
마트에 간다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며 글을 쓰면서까지 생각을 하는가- 싶지만, 마트에서 산 품목들을 냉장고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뒤, 저녁을 배불리 먹고 잠도 잘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이 모든 일이 욕심으로 부풀어졌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도 그런 게 좋아하지도 않는 냉동식품을 잔뜩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상하지 않을 만큼, 필요한 만큼 사야 하는 신선식품과는 달리 냉동식품은 약간 ‘쟁여놓는’ 비상식품에 가까운데, 물론 조리의 편리함 때문도 있지만 냉동실에 넣어두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한 장점 때문에 과도하게 소비하게 될 요인이 크다.
묶음으로 팔던 1+1 냉동만두와 몸에 좋지도 않은 치킨강정이 들어 찬 냉동고를 보면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유럽의 납작 복숭아가 떠올랐다.
한국에 없다는 희소성, 그리고 한 입만 베어 물어도 넘치는 달콤한 즙, 납작 복숭아는 한 번도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나름의 중독성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납작 복숭아를 딱 한 개만 먹는다면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꼭 쟁여두고 한 번에 여러 개를 해치우게 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필요의 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소유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에 의해 소비되기 전에 내가 소비해버리는, 아주 깊은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욕심 때문 아닐까.
물질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소유-를 주장할 순 없지만, 나의 오감이 만족하고 그 가운데 ‘감사’를 경험하게 하는 선을 지키고 살아간다면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욕심을 조금씩 분리할 수 있을 수도 있겠다. 하나의 납작 복숭아가 주어질 때 더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 수 있듯이.
욕심의 반대말은 감사다.
주어진 것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감사의 시작이고 행복을 느끼는 지름길이지 않을까.
덧. 그럼에도 하나의 납작 복숭아를 앞에 두고서 맛있게 먹을 사람도 있는 반면, 왜 두 개 못 먹냐고 불만인 사람도 여전히 있다. 그들은 아무리 즐거운 일을 경험해도 불만을 말할 사람들이니 그냥 멀리하는 게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