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이여, 취하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경험하고 말하라.
출퇴근길에 한 유튜브 채널을 보다가 '84년생이 곧 마흔!'이라며 어떤 배우가 발끈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이 앞자리가 '4'로 바뀌었을 때 내 기분은 어땠었나? 수면 위로 올라와서 겨우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든 게, 내게는 '마흔'이라는 나이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것들을 뒤로하고 내 마음만을 살펴보자면, 난 엊그제 20대 초반이었던 것만 같다. 아마도 그 배우,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쏜쌀같이 흘러간 세월 앞에서 약간의 앙탈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 드라마, 영화, 노래 가사를 듣다가도 지나간 청춘에 대한 회한은 자주 등장하지 않던가.
체감상은 가깝지만 이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나의 20대 초를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열심히 내 자아를 찾기 위해 버둥거린 반면, 연애에는 극히 젬병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거나 입고 아무거나 발라도 젊음 그 자체로 예뻤을 나이에 쓸데없는 고민들은 한 가지씩 안고 살았고, 또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나가던 시간이 대학교 생활이었다. 마모되어 둥글어져 가는 친밀한 관계들을 많이 만드는 대신 나는 책을 읽었고, 수업을 들었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들었다. 연애하며 '타인'에게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마음 편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건 상처받기 싫다는 일종의 회피 행동에 지나지 않았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인싸' 같은 '아싸'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주변 모두와 알고 지내면서 그 누구와도 마음 터놓고 지내지 않는 것만큼 외로운 일은 가히, 없었다.
그 어여쁜 나날들 속에 설레는 기억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도서관에서 자리 잡고 공부하고 있다가 잠시 화장실 다녀오면 자리에 놓여있던 카페 라테와 메모지의 수줍은 손글씨. '열공하세요!' 같은 글귀를 보며 대략 짐작 가능한 '그'의 호의에 슬며시 웃었던 순간들. 그 당시 그 컵 커피의 광고 카피가 '사랑한다면 까페라떼처럼'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들 내 또래에는 꽤 많으실 것 같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 나니 '라테처럼'이 꼰대를 지칭하는 말머리처럼 되어 버린 지금이 웃프기도 하다. 그때 그 아름다웠던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캠퍼스에서 마주치고, 시내에서 마주치고, 그럼에도 마주 보며 웃기만 하던 청춘들은. 그때 내가 지금의 나였다면 당찬 고백들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와 생각해도 너무 어리고 순진했던 새내기의 나날들이었다. 사랑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알 것 같은 말들을 지껄이고 다녔지만, 경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 진작 좀 인정하고 거기에 뛰어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캠퍼스의 가을은 나에게 꽤나 혹독한 성찰의 시기로 다가왔다. 설레는 봄과 빛나는 여름이 지나면, 가을에는 헤어지는 커플들이 주변에 꽤 많았다. 근데 나는 이렇다 할 성과라는 게 없이, 봄에 썸만 타다가 끝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나름, '난 뭐가 잘못된 거지?' 이런 생각들을 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알량한 어린 자존심에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어때서?'라는 말들로 포장하기 급급했다. 3년 동안 지적인 호기심과 수많은 여행으로 점철된 대학 생활들 끝에, 어느 정도는 내 마음에 사람을 들일 수 없는 이유를 알고 그 원인에 대해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시작했던 게 3학년 가을이었다. 당시에 나는 비전공이며 취업에도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심리학과 수업을 꽤 여러 개 수강하면서, 나의 내면의 두려움과, 가장 '친밀한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건 한 학기 수업 수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아주 복잡한 실타래의 초입을 발견했던 것이 그 시기였을 뿐이고,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교 다니면서 가장 잘한 것 중 하나가 심리학과의 수업을 수강한 것이었다. 이제껏 몇 개의 글을 읽어봐 주신 분들은 짐작하실 수도 있겠으나 내가 20대에서 더 나이 들기 전에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했던 관계는, 모녀 관계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내 동경의 대상은, 타인이 아닌 나의 엄마였으니까.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몰랐던 아이는,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사랑받을 줄 몰랐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그분은 내가 졸업하던 6학년 때 다시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셨는데, 그분이 졸업할 때 가만히 내게 말씀해 주신 게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아이가 돼라'라고. 안타깝지만,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도 몰랐었다.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은, 가을이 오면 엄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였다. 나는 어릴 적에 엄마가 보고 듣고 좋아하던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러면 더 사랑받을 거 같아서, 그랬을까도 싶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에 공부를 하셨다. 불문학이었다. 엄마 방에 있는 문학책들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녀가 들었던 에디트 피아프는 지금도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들 중 하나다. 그렇게 자라서 나이를 먹어가며 막연히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할 때, 나는 절대로 나와 같이 생각이 복잡한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를 사랑하면서 미워하는 양가감정이 들 때까지는 모든 가족들이 그러할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숨어있겠지만, 위 문단에서 이야기한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데 20여 년이 훌쩍 넘게 걸리는 중이니까 어찌 보면 이게 내 인생에서 제일 큰 과제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해외에서 산지 10여 년이 넘어, 나는 지금의 내 마음 상태가 된 게, 감사하고 다행스럽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넘어서야 비로소, 어떤 방식으로 나 자신을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를 사랑해야 하는지 - 이건 예컨대 흔히 말하는 '욜로 (you only live once의 머릿글자를 따 YOLO - 인생은 한 번뿐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즐기며 살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와는 거리가 멀다. 겉보기에 화려한 삶은 간혹 속이 공허할 때가 많았던 지라, 이제야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은 기분이라서 그렇다. 내 방식이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또 묵묵히 가다 보면 알겠지만, 삶은 이렇게 무던히 노력해야 알 수 없는 순간에 툭 던져지는 깨달음 하나 얻어, 살만한 기분이 되는 것일까 싶다. 참 오묘하고 달콤 쌉싸름한 게, 매일 두세 잔씩 마시는 에스프레소 머신 커피가 아니라 그때 그 도서관에 있던 그 카페라테처럼 달달하면 좋겠는데.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아직 그 컵 커피가 건재하고 심지어 해외까지 수출되는 게 신기하다. 세상에는 나처럼 추억을 조금씩 먹고사는 사람들이 아직, 건재할 것이라 믿으며 한밤중의 글을 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