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추석의 꿈

너와 함께 손잡고 걷는 꿈

by 장서율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 주간이다. 개천절도 붙어 있어 5일 연휴라고 들었다. 올해는 코로나로 많이 귀향이 축소되었겠지만, 내가 8년째 거주 중인 이 나라에는 중국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추석 연휴가 없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월병을 먹는 관습은 남아있어서, 매번 이맘때쯤 되면 월병 상자를 고객들에게 돌리느라 골치 꽤나 아픈 시즌인데, 올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박스 안 돌리고 끝낼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웬만하면 예년의 반 정도만 예산 집행하자고 들었으니, 나도 발품을 줄인 셈이다. 월병 들고 찾아가는 게 관습이긴 하나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전화나 이메일 만으로는 어렵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말해야 결국은 '관계'를 확인하고 '비즈니스'도 정립된다. 이 시즌이 좋은 구실이 되는 셈이다. 수고했다고, 잘 버틴다고 고객이 사 주시는 커피 한 잔이 참 따뜻하다.


싫은 사람이랑은 차 한 잔도 하기 어려운데, 좋은 고객분들이 계시는 건 감사한 일이다.


이 곳에서의 첫 해 추석은 혼자 집 옆 별다방에 앉아서 월병을 저녁으로 먹는 것으로 때웠다. 회사에서 나눠 준 내 손바닥보다 큰 그것은 원래 혼자 먹기에는 부적합한 고칼로리에 당 덩어리다. 칼로 잘게 쪼개서 먹는 게 맞다. 그날 저녁은 뭔가 만들어 먹을 생각이었는데, 세 들어 사는 집주인 아들내미가 대학교 졸업 과제한다고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온 걸 보고 글렀구나 싶어 나왔는데 갈 곳이 거기밖에 없더라. 서글퍼도 달 보면서 나도 몇 년 있음 여기서 가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던 것 같은데. 바로 이전 글에도 썼지만, 여기서도 영화관에 앉아 샌드위치나 팝콘 같은 걸로 많은 저녁을 때웠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 정도는 외롭지 않았거든. '겨울 왕국 (2013)' 같은 걸 보고 신나 했던 게 엊그제 같아. 세월 참 새삼 빠르다.


그날의 저녁은 당을 들이부어도 헛헛했다

그 후 몇 년 동안의 부침을 거쳐 2020년에 이르렀지만, 신기하게도 관계가 끊어졌다가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 어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분은 해외에서의 내 결혼을 극구 반대하셨던 선배님이셨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비즈니스를 크게 하시는 분이라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는데, 나는 내 감정이 맞다고 밀어붙였던 나의 어리석음에, 죄송해서 몇 년을 연락을 못 드렸었다. 작년 이맘때 즈음 뵙고 잘 있냐며 식사 한 끼 하자고 불러주신 마음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 어떻게 이렇게 1년이 빠르냐' '큰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구나'. 내가 많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슈퍼마켓에서 팔던 꽃을 사다가 꽃다발을 만들어서 드렸는데 많이 좋아해 주셔서, 내가 더 감사했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어버버 얼버무리는 나에게 또 애정 어린 일침을 가하신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며, 관계도 노력해야 하는 거라고. 이번 추석도 가족은 보지 못하지만 참 따뜻한 분들이 계셔서 다행이다. 다시금 초심 잃지 말고 살아보자며 다짐했다. 인생은 살만한 거라고, 길흉은 돌고 돈다며.

꽃을 보고 기뻐해 주셨던 그 분의 미소가 향기로웠다


예정대로 밤에는 친한 친구네 집에 짐 싸들고 놀러 와서 함께 산책하며 달을 보았다. 연애나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던 주제가 자연스럽게 어떻게 잘 살고 잘 나이 들어야 하는지로 옮겨간다. 우리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에 그녀도 나도 모두 함박웃음까지는 아니어도 잔잔한 미소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와인처럼 숙성하길 바라면서, 주변에 상처 주지 않고 도움되는 사람이길 바라면서, 조금 이를지도 모를 노후 계획을 세운다. 가까운 미래에는 꼭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디아스포라, 하우스셰어, 이런 식의 가족들의 더 많이 늘어날 것 같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유대감과 소속감은 그렇게도 얻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이 건강히 오래 사시길 바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한 몸 건사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빛나는 젊음을 누린 대가이자, 가능하면 베풀고 살아야 하는 숙제 같다. 기껍게 나이를 먹고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다행히 날이 맑아서 볼 수 있던 큰 보름달.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만면에 웃음 띠며 얼굴을 알지 못하는 그와 손잡고 길을 걷는 꿈 말이다. 아직 나는 행복한 사랑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이런 나라서 좋다. 마음이 젊은 건 나이랑은 상관없다. 설렘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죽는다고 말했던 건, 나를 나이게 하는 설렘과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본격적으로 나이 드는 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지만, 그렇게 예쁜 불꽃처럼 살고 싶다. 아침에 눈을 뜨니 벤자민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자기 나라에서는 확진자가 줄지 않아서 걱정이라며, 추석의 보름달은 보았는지 서로 안부를 물었다. 내 마음도, 비록 몸은 고향에서 멀지만, 마음만은 따스하다. 그대가 어디에 계시든, 마음만은 따뜻한 명절이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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