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나의 벤자민들에게

by 장서율

한 사람의 인생에는 수많은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그걸 각자의 기억 안 서랍에서 꺼내 보는 건 본인 마음의 여유에 달려있는 것 같다. 지난번 '나의 벤자민'을 쓰고 나서 한동안 그에게 연락을 다시 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봤었다. 그리고 잔잔한 수면 위에 돌을 던지듯 SNS 쪽지를 던졌다. 답이 오건 안 오건 그건 우리의 인연법이 알려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속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 친구와 긴 시간에 걸쳐 와인을 세 병 정도 마신 후,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진짜로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필요에 의해서, 혹은 주변에서 밀어붙여서, 혹은 일시적인 욕망으로, 혹은 상대방이 너무 잘 생겨서, 혹은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만났던 사람들 뿐 아니었을까? 내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뭘까? 어렴풋이 정리한 답은 - 사랑이라는 추상 명사에 답이라는 게 있을까 싶지만 - 지금까지도 진짜 아쉬운 인연이 있다면, 그들이 내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상대였다는 의미가 아닐까,라고 결론 내려봤다. 나는 어쩌면 그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에 빠져버렸던 사람들은 어쩌다가 나의 잉여와 그들의 결핍이 케미를 이뤄냈기에 가능한 인연들이 아니었을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챙겨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사랑받는 법을 잊어버렸던 건 아니었는지.


학교와 직장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났던 그들 가운데 내게 먼저 다가온 남자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 엄마가 없다는 거였다. 관심에 목말라있고, 나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는, 여리고 소심하고 예민하지만, 나에게는 잘하는 그들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자라면서 진짜 원했던 것 또한 '엄마의 사랑', '관심' , '무한대의 수용' 같은 것이었는데.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한 건 나 역시 받아들여지고 싶어서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관계들에서 내가 호구가 되는 걸로 끝이 난 건 참 슬프다. 사랑을 통해서 나는 많이 아팠고, 그걸 뛰어넘어야 할 때마다, 무언가를 하나씩 배워서 성취해 나갔다. 그게 공부든, 요리든, 악기든, 운동이든, 이별을 통해 성장했던 건 사실이니 내가 만났던 그들 모두가 내게는 어떤 의미에서의 귀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벤자민을 떠올리면서 반추한 게 하나 더 있다. 그가 그리웠던 건, 계속 함께 있어도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사귀었던 내 남자 친구들을 돌아보면, 온전히 그들과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별로 없다. 관계를 가지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저 온전히 하룻밤을 같이 보낼 정도로 신뢰할 수 있었던 사람이, 내 마음의 빗장을 100% 여는 사람이 내 남자 친구들 가운데 정말 적었던 것도 조금은 슬프다. 아침에 깨고 나서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었거나, 혹은 그의 팔베개보다 내 방 침대가 훨씬 더 편했거나, 그냥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새벽녘에 조심스레 그들을 두고 집으로 향했다. 어떤 상대를 만나서, 호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때, 완전히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내 모습, 허락할 수 없는 내 몸. 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보여도 괜찮을, 그렇게 해도 나를 사랑해 줄 상대를 오래도록 갈망해 왔었다. 내가 그냥, 나여도 되는 사람을 바랐었다.


벤자민과의 사랑이 지속될 거라고 믿었던 건 그와의 나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행복해서, 곧 그게 나의 일상이 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살짝 손 대면, 오소소 소름이 돋던 그의 피부가, 땀 냄새가, 기억난다. 그 사람 얼굴은 잊었어도 그 입술은 마음에 있다는 어느 시에서처럼. 어느 비 오던 날, 그가 일 때문에 이번 주말에 바빠서 오지 못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아쉬움과 상실감에 빗길을 뛰어 집에 들어오다가 욕실에서 크게 넘어져서 온 몸에 피멍이 들었던 것, 그렇게 몸져누워서 다음 날 회사에도 가지 못했던 게 기억난다. 그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그때 나는 알았다. 이제 이 관계에서 약자가 나라는 사실을,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이 마음을 줘 버린 것을. 그와 함께 갔던 식당, 같이 갔던 옷집, 지나다니던 길목을 보는 게 힘들어서 이사도 갔었다. 이제는 그 자리에 그 가게들이 있지도 않은데, 많은 게 변해도 아직 그 거리를 걷던 우리가 보인다. 그가 했던 말들은 몇 마디 빼고 이제 잘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아직 그 거리에 고스란히 있더라. 그를 만나러 먼 길 떠나 그가 일 끝내고 나오길 기다리며 마시던 금요일 낮의 카푸치노 한 잔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잘 자라고 안아주던 그의 어깨가 얼마나 좋았는지, 벤자민 너는 아마 모를 거야.


안녕 나의 벤자민. 나 이제 진짜 사랑을 찾아 떠날래. 내가 온전히 나여도 괜찮은 사람. 그가 그 모습 그대로여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만나고 싶어.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 나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해줘서 기뻤어.


사진 출처 : https://www.sensecuador.com/blog/ecuadorian-roses-best-roses-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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