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이맘때 즈음, 이 나라 공항에 내가 처음 발 내리던 날이었다. 배낭 하나, 잠들 때 안고 자던 인형 하나, 큰 캐리어 하나를 매고 끌고, 바짝 주눅 들어있던, 청바지와 검은색 민소매 차림의 단발머리 한국 여자.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이 나라에서 이력서와 전화 면접 만으로 '묻지 마' 이직에 성공한 나는, 그 덥던 여름날에 학수고대하던 해외 취업과 독립에 성공했다. 신기하게도, 힘들 때면 자주 찾아갔던 타로 마스터가, 늘 이야기했던 정확히 그 해의 8월이었다. '너, 암만 거부해도 결국에는 이 달 이 즈음에는 머리끄덩이 잡혀서 해외 나가 살 팔자야' 라던.
지루하게 소심했던 나는, 공항에 마중 나온다는 집주인과 그 에이전트가 한 달치 월세를 노리고 나를 납치라도 하면 어쩌나 하며 회사의 매니저에게 공항에 나와줄 수 없겠냐고 미리 부탁까지 했었다. 그 모든 게 기우였던 걸 우리 모두 얼굴 보고 인사한 그 순간 바로 알았다. 안전하고 따뜻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준 이 나라. 내 마음은 그렇게 잠금 해제되었다. 그날의 에이전트였던 파멜라와는 20년 나이차를 두고도 지금까지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고, 그녀는 이 나라에서의 내 연애사를 모두 아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회사의 우리 팀은 모두 열 명이었고, 팀워크가 좋았다. 일할 때는 개별적이지만, 놀 때만큼은 매니저를 주축으로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 문화에 빠르게 적응했고, 바로 다음 연휴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국경에 맞닿은 매니저의 고향 도시로 식도락 여행을 떠났다. 우리 팀엔 디제잉이 취미인 조슈아도 있어서, 도착한 그 밤 우리 팀 사내 커플을 제외하고, 우리는 아시아에서 규모로 먹어준다는 한 나이트클럽에 입성했다. 게다가 조슈아 인맥으로 그 긴 줄도 안 서고 테이블도 잡았다. 부킹이 싫어서 나이트클럽보다는 홍대 클럽을 더 선호하는 나였는데, 외국 클럽은 그런 우악스러운 강요가 없이 자유로워서 너무 좋았다. 나는 거기서 한국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아는 벤자민을 만났다.
진지한 얼굴에 다부진 체격을 한 벤자민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신뢰감을 팍팍 심어주는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영업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언변이 청산유수였다. 클럽에서 만난 사람 절대 믿지 말자 주의였지만, 그날 우린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나이와 회사와 하는 일을 밝히고, 전화번호를 나누고, 예의 수순을 밟았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아쉬워 새벽동이 트도록 그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타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 차를 얻어 탄다는 건, 아주아주 위험한 일탈임을 안다. 눈빛이 선했던 그는 나를 무사히 호텔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우리 팀이 안에서부터 걸어 잠근 방에 카드키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깊이 잠든 그들은 아무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를 바래다준 벤자민은 묵묵히 옆에 있어주었다. 그러면서 눈 감아 보라고 하더니, 잠시 동안 내 입술에 입 맞췄다. 그리고는 물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져?' 그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그는 몇 시간 뒤에 같이 늦은 아침을 먹자며 다시 찾아왔다. 나를 데리고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는 브런치 집과 디저트 가게를 돌았다. 주스를 마시며 그가 물었다. 넌 아이를 몇이나 갖고 싶냐고. 벤자민은 그때의 나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하지만 일이나 인생 설계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은 고민을 이미 해 본 뒤였던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미래의 청사진을 명확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좌절과 실패가 많은 20대였어서, 도전하는 것마다 무너지고, 주변에 치여서, 아직 열정이 남아 있을 때 살 길 찾아 나온 해외에서 한 번쯤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벤자민은 가능하면 빨리 돈을 모아 일찍 결혼해서 일찍 애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가 귀여웠다.
그 주말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솔직히 나는 이 관계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냥 그렇게 연락이 끊길 거라고 생각했다. 기대할 것이 없는 관계에서는, 쓸데없는 기대는 상처를, 배신을, 이내 이별을 수반한다는 걸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 주말 이후 매일 아침 벤자민은 굿모닝 문자를 보냈고, 매일 밤 잘 자라는 말을 해 줬다. 주말에는 시간 정해 전화를 하고, 일상의 사진들을 보내고, 접대하고 술 마시고 늦게 집에 귀가하는 길에는 카카오톡으로 '아이고 힘들다 자기야'라는 말을 한글로 쳐서 보냈다. 나는 굳이 우리의 관계를 정의했다. 그는 말했다. '당연히 넌 내 여자 친구야. 그게 아니면 뭐라고 생각해?'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은 그때도 지금도 참 무섭다. 마음이 스르르 빗장을 열면 그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이 잠식되는 게 '사랑'이라는 거여서. 연애하면서 상대에게 애정과 관심을 받을수록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니까. 하지만 벤자민이 그때 그 자리에 있어주었기에, 나는 외롭지 않게 이 나라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으니까, 주말에 그가 오거나 내가 가거나 하면, 함께 쇼핑도 외식도 산책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와이셔츠를 골라주는 일이 참 좋았다. 벤자민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자주 물었다. 나는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다고, 하지만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을 한다고. 벤자민은 그럼 우리의 이야기를 써 달라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에서는 불꽃축제가 열렸다. 형형색색 폭죽이 팡팡 터지는 기분이었다. 연애는 할 때마다 참 새롭구나 싶었다. 그즈음의 나는 참 생기발랄했다. 일이 힘들어도, 눈이 반달 모양 되도록 웃었다. 팀 사람들은 자주 벤자민에 대해 물었다.
그는 24시간 고객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는 특수 업계 종사자였다. 통화나 문자 하다가 끊길 때도 많았다. 나는 이해해 주려고 했다.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변덕스러운 거라, 나도 모르게 그에게 기대 버린 나는 이미 징징대고 있었다. 연말이 되어 우리 업계도 피크여서 자주 야근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정신 차려 보니 밤 11시가 넘어가고,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아있고, 사무실 구석에서의 괴담을 익히 들은 터라 머리가 쭈뼛 섰다. 벤자민에게 전화를 하려다 멈칫했다. 바쁘겠지. 방해하지 말아야지. 서로의 그런 배려가 쌓여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던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보고 싶을 때 바로 뛰어갈 수 없는 거리의 연애는 참 힘든 거였다. 파멜라에게 전화를 걸어 이메일 몇 개 쓰는 동안 통화해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그녀는 기꺼이 나와 함께 해 주었다. 내 마음은 체념에 가까웠다. 그냥 또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남기려고 했다.
벤자민은 새해 인사를 하면서 너무 바빠 연락을 못 할 것 같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성장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남자한테 일 빼면 뭐가 남을까 싶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울었다. 그 연말연시에 나는 많은 파티에 참석했고, 거기에서 또 다른 벤자민을 만나지는 않았다. 그냥 그동안 안 하고 살았던 것들을 해 보고 싶었다. 샴페인을 마시고, 페도라를 쓰고, 거기에 길가에 많이 피어있는 프렌치 페니 꽃도 하나 꽂아보고 그랬다. 그렇게 3개월쯤 있다가 두 번째 남자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오래 못 갔다. 벤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기에. 그와 오래도록 통화하고 울었다. 그는 나에게 다 잘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는 더 이상의 의미 부여가 필요 없지만, 그때 그의 말들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 1년 정도에 걸쳐, 우리는 우연처럼 몇 번을 더 만났다. 그리고 헤어질 때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나를 가볍게 안아주며, 잘 살라고 벤자민은 말했다.
그리고 2년 즈음 더 흘러, 내 약혼자와 여행을 갔을 때, 아주 오랜만에 벤자민에게서 잘 지내냐는 안부 문자가 왔다. 많이 놀라서, 그때 그의 연락을 차단한 걸 지금은 후회한다. 그냥, 잘 사냐고 물어보고, 나는 잘 있다고, 이야기할 것을 그랬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연애하다가 헤어졌다고 남녀가 친구로 남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냥 한 때 내 인생 깊숙한 곳에 들어와서, 나한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주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고 간 것에 심심하게 감사한다. 그와의 이야기를 써보는 건 오래 걸렸지만, 내 인생에 잠깐 머무르다 떠나간 벤자민은 나에게는 그리움, 그 자체인 것 같다. 새로움과 설렘, 편안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알려준 사람.
그 맘 때가 또 다가오면, 나는 매년 나 혼자 나의 '입성 기념일'을 축하하곤 한다. 그 타로 마스터가 이야기했던 '떠나고야 말 상황'은 그랬다. 8년 전 나는, 그때도 힘에 부친 회사를 다니며 어떻게든 정착해서 평범하게 살아 보려고 참 많은 소개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에게서, 만난 지 다섯 번이 채 되지 않아 프러포즈를 받았다. 외모도 성격도 내 평소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음만은 참 편하게 해 주는 그였기에, 아마 한국에 남았었다면 그 사람의 전셋집에서 함께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꺼이 무모에 가까운 모험을 택한 내게, 그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을 마음에 새겨달라고, 어디 가서든 잘 살아갈 '나'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마음에서 따뜻함과 아쉬움의 감정들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렇게 거부하지 못할 선택과 결정의 순간은 참 우연히 찾아오고, 삶이 그 한순간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던 그 해. 그 후 다사다난한 연애와 경험들을 통해 성장했을 내 마음. 나를 나답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끊임없이 사랑을 믿는 나라는 것이다. 아프게 이별하고도 오뚝이처럼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랑을 꿈꾸던 나. 나라는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해준 사람들에게는 한 없이 감사하는 밤이다.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는 사람은 또 만나고야 말고, 그 인연이 다했을 때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이렇게 수많은 낱알 같은 사람들 가운데 만난 우리는, 너와 나는, 그 만남 자체 만으로도 기적이었던 거다. 관계의 목적이 있었든 없었든, 국적도 나이도 배경도 모두 떠나서 이해하고 이해받은 우리의 기억들은 내게는 참, 따뜻하다. 안녕 나의 벤자민. 잘 살고 있기를 바래. 너와 내가, 우리의 꿈들 속에서 행복하길 바래.